https://www.youtube.com/watch?v=VMYehzKzsVM&t=4s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새번역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길의 끝에서 눈먼 거지를 만나다
마가복음에서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가 길입니다. 길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이제 이 길 끝에 거의 다 이르렀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가 마지막으로 들리는 곳입니다. 여리고는 길의 끝을 말합니다.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진리에 거의 다 이르렀으면 눈이 열린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역설적으로 눈먼 사람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유형별로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제자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도 그렇고,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도 이런 부류의 사람에 속합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대언적 행동이나 말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바디매오입니다. 그 뜻은 디메오의 아들입니다. ‘디메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라 해서, 귀하게 여기다 명예롭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어 타메טָמֵא라는 이름을 음역한 것으로, 히브리어 이름의 원래의 뜻은 부정함, 더러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디메오를 사람들이 그저 부정하고 불결한 사람이라고 불렀을 뿐, 정작 그 이름을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디메오는 진짜 아버지의 이름이 아닐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나면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부정된 사람입니다. 나자 마자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입니다.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서 길러졌기에, 니 아버지가 누구냐고 했을 때, 쓰레기와 같은 주변 환경이 내 아버지인 것입니다. 아마도 길에 노숙하는 거지가 불쌍히 여기어 밥 먹이며 살려서 키웠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디메오처럼 아버지가 없는 자는 혈통적으로 볼 때에 유대인이 아니라고 부정됩니다. 그리고 길에 버려져서 길에서 자란 자이기에, 물려받을 유업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은 진 중 밖에 있도록 했습니다. 부정함을 벗은 후 진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구원관은 공동체에 귀속성으로 판단됩니다. 만약 유대 공동체에 쫓겨나거나, 기업을 잇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바로 구원에서 멀어진 사람입니다. 심지어 눈까지 멀었습니다. 이런 저주의 삶 속에서 바디메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이유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운명은 그냥 저주받은 인생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야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이 고통스러울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치료받으면 되겠지만, 마음이나 정신은 다릅니다. 정신과 약을 먹지만, 이게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나 마취제인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 아플 때 치료약은 철학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걸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보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주입식 교육은 영혼을 파괴할 뿐 영혼을 고치지 못합니다. 신앙도 교리가 아니라 신학이 필요합니다. 교리는 주입식이지만, 신학은 스스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생명이 있고 힘을 가집니다.
바디메오는 인생을 아무 생각 없이 살지 않은 듯합니다. 눈이 먼 사람이지만, 성경에 익숙해 보입니다. 47절을 보시면, 예수림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라 불렀습니다. 이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 짧은 고백 안에 큰 깨달음이 담겨있습니다. 바디메오는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다지파에서 나온다는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성경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성경을 읽어주는 곳으로 찾아가서, 귀로 성경을 들은 것이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자신의 인생으로 가져와서 해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메시아가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좋은 소식, 즉 복음을 가져올 약속을 받은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이며, 이 메시아를 통해 주어질 복과 그 언약이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고 따르면, 지금까지 쫓겨나서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구원 공동체로 자기도 속하게 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눈먼 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듣고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가 똑똑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아닙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진리에 대해서 성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거지로 길에서 자라나 길에서 살았습니다. 진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길 끝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결단도 중요합니다. 저주라 여겨진 환경을 불만불평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행동했습니다. 자신은 눈이 멀었지 사지는 멀정하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낸 것입니다. 거지처럼 밥이나 구걸하며 산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성경을 들으며 사유하고 고민했습니다.
장님이 주는 첫 번째 의미,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
바디메오가 장님이라는 것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우선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찾으려고 길을 헤매다가 이제 도착을 했는데, 여전히 눈먼 장님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깨닫지 못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게 영적으로만 답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제자들은 현실적으로도 답이 없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위기의 상황입니다. 길을 찾아왔는데, 답이 없습니다. 길이 이어져 있으면 생각 없이 길을 무작정 걸어가면 되는데, 문제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안한 사람 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주술입니다. 원래 인생이란 게 안정적인 게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걸 알고 미리 생각하면서 위기에 대응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이런 사람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주술에 의존합니다. 인생이 잘 나가가는 사람은 관심이 없겠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술적인 것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인생 잘 나가도, 사람은 결국 주술에 의존합니다. 정치인들이나 사업하는 사람들 보면 상당수가 주기적으로 다니는 사주를 보는 곳이나 점집이 있습니다. 이런 곳 중에서 영험하다고 하면, 잘 맞추는 걸 말합니다. 무당이 직관적으로 잘 맞추면 영험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묻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다. 점집에 가면 하나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오기 때문입니다. 중년 여자가 근심한 얼굴로 들어오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자녀 대학 보내는 문제입니다. 중년 남성은 거의 사업과 진로 문제이고 간혹 건강 문제입니다. 이 둘 중에 그냥 대충 찍으면 맞습니다. 그리고 상담할 때, 좋은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것만 말해도 안됩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엔 좋은 이야기를 하나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지 미끼가 되어서 사람들이 덥석 물게 되면 넘어가서 부적도 사고 돈도 내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불안을 이길 수 없다
이들이 사람들에게 심어 주는 것은 일종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불안감을 조성해서 작은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믿음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근본적인 것이 해소가 되지 못하니깐 또다시 계속해서 점집에 들리는 것입니다. 일종의 공포 마케팅인 것이지요. 이걸 보면서 불안을 이겨내는 것은 단지 맹목적인 믿음만으로는 안됩니다. 불안을 이겨내려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찾아온 그 어떤 고난이라도 이것이 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다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신을 넘어서는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오해를 바꾸는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배척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편견 없이 받아 들어야 합니다. 이게 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을 보는 것이나 듣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이게 교육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우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게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는 장님인 바디메오가 가장 큰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보게 해 달라는 바디메오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보지 못하는 자가 오히려 믿음이 있는 역설적 상황인 것입니다. 왜 이런 역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은 보다고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는다고 하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바디메오를 통해서 제대로 보는 것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장님이 주는 두 번째 의미, 제자들을 이끄는 선견자의 역할
따라서 바디메오가 장님인 두 번째 이유는 바디메오가 선견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장인은 지혜의 안내자입니다. 종종 신들과의 싸움에 휩싸이거나 불운한 사건으로 고통받아 육신의 눈이 멀게 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지력과 내면의 지혜를 얻어 세상에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을 하려면 육신의 눈이 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를 보기 위해서는 육신의 눈이 닫혀야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듣는 것에 확신을 가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내가 그럴 것이라 확신했던 것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이나 역사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악이라는 시스템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시스템 너머에는 선이나 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을 하게 되면, 이런 인식과 깨달음을 놓치게 됩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결국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이럴수록 눈을 감아야 합니다. 이면에 감추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길 위의 장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맹목적으로 믿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믿음이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입니다. 눈을 감을 때 처음에는 믿음을 흔들리고 흐리게 되는 것 같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오히려 분명한 것만 남게 됩니다. 외부가 아닌 내면이 보이게 되면서, 내 마음의 중심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되는 믿음만이 남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뼈대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자신의 소명이거나, 아니면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뒤, 하나님 섭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체험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진짜 믿음인 것이지요. 일종의 업그레이드된 믿음입니다.
소망은 업그레이드 된 믿음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다 안다고, 다 깨달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눈에 천하를 내려다보고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본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정작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품이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어본들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종짓잔 만한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 말씀처럼 내일 일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일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쓰러지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감당하는 힘을 업그레이드된 믿음으로 소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현재가 고통스럽고, 내일 좋아질 이유 하나 없고, 더 비극적인 상황만 예견되어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소망인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확신이나 지식들 중에서 허풍과 허영의 거품이 다 빠지고 간결하게 오직 내 마음을 붙잡는 힘은 소망인 것입니다.
이 소망이 바로 바디메오에게서 나타납니다. 바디메오의 사건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기적이라는 사건에 매몰되거나,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꾸짖었으나 더욱더 큰소리로 간절히 외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함이 바디메오를 구원했다는 정도로 오늘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디메오는 단순한 확신이나 간절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바디메오의 행동과 움직임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디메오의 행동을 일곱 가지의 동사로 표현합니다. 바디메오는 ‘듣고, 외치고, 벗어던지고, 일어섰고, 다가갔고, 보게 되고, 따라갔다’라고 말합니다. 바디메오의 믿음이 단순한 관념적 확신이나 간절한 열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바디메오는 행위가 따라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믿음에 공적이 붙으면 소망이 된다
이렇게 믿음에 행위가 붙는 것, 일종의 공적이 붙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 공적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바디메오가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앞서 바디메오가 성경에 능하다고 했습니다. 눈먼 거지가 어떻게 성경을 듣고 사유하면서 결론적으로 예수를 다윗 자손 메시아라 고백하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겠습니까? 이게 단순한 직통 계시만으로 깨달아지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기도하면서 오랜 시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그 공적이 붙습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소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소망도 단순히 바라는 게 아닙니다. 소망은 믿음이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고, 그리고 다시 농축되어 나온 진액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 소망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직통계시와 법통계시
계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직통계시와 법통계시가 있습니다. 직통계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중개 없이 개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신비적이고, 개인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입니다. 법통계시는 이미 성경과 같은 형태로 정립된 법적이고 도덕적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는 방식입니다. 개인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인 형태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율법이나 계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적 권위를 지니며, 개인의 직관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믿음의 시작이 직통계시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성경을 읽다가 깊은 생각 속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한다, 무엇이 맞다가 아니라, 이 둘이 상호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를, 직통계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직통계시가 매력적입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법통을 중시합니다. 성경 자체가 율법 말씀이기에 법통입니다. 성경중심적이라는 것은 법통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킬 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없이 나올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날을 기념하여 지켜야 할 유월절 규례를 가르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에게 주어진 열 가지 재앙, 그리고 홍해를 건너가는 사건,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는 것들 모두 직통계시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짐승과 같은 노비의 본능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 들어선 지 몇 날 며칠이 안되어 물과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말자 소란이 나고 불평이 넘쳐났습니다. 심지어 직통계시로 기적을 일으켜 물과 음식을 주어도 입맛이 없다고 불편하다고 원망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율법으로 40년간 광야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짐승과 종의 버릇을 고칠 때까지 가르치셨습니다.
겉옷을 벗어던지고 나아가다
오늘 본문 50절을 보면, 예수님이 바디메오를 부르신다고 사람들이 전하자, 바디메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겉옷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직통계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데레트אַדֶּרֶת입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언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사장이 입는 에봇과도 비슷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사장의 경우 에봇에는 우림과 둠림이라는 돌을 넣었습니다. 제사장은 이 돌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점을 쳤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아둘람 굴에서 위기에 처하자 제사장도 아닌데 에봇을 붙잡고 우림과 둠림으로 점을 쳐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도 호랩산 동굴에서 작은 미세한 소리 속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났을 때,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운 채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 겉옷을 통해서 직통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호렙산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를 명하십니다. 그중 마지막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후계자로 삼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났을 때, 기름을 붓지 않고 겉옷을 툭 던집니다. 왜 기름을 붓지 않고 겉옷을 던졌는가 하면, 이제 너도 나의 제자가 되었기에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는데, 그토록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겉옷을 떨어뜨려줍니다. 이제 네가 직통계시를 받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승천을 하면서 겉옷을 벗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엘리야 자신이 더는 직통계시에 따라서 개인적인 예언을 하는 자가 아니라, 법통을 따라서 보편적 계시를 전하는 자로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것은 해처럼 솟아올랐음을 말해줍니다. 해가 모든 사람에게 빛을 전하는 것처럼, 자신이 법통계시의 전달자로서 그 위치에 섰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이 땅이 아니라 법으로서 하늘에 올라선 것입니다.
겉옷은 직통계시를 상징한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5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바디메오가 고백한 것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습니다. 바디메오가 겉옷을 던져 버리면서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눈먼 장님으로 살아가면서 직통계시로만 깨달았지만, 이제는 법통계시로도 깨닫는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바디메오는 그리스의 눈먼 현자들처럼 장님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바디메오가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말씀을 듣고 깨우치고자 법통계시를 좇은 것입니다. 그러나 법통계시로 완전히 초월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쫓아야지만, 법통계시가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디메오의 고백이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칠 때 주시고자 한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내가 일으키는 기적들, 그리고 직통계시와 같이 뭐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이끌림 받아 따라왔지만, 너희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법통계시를 받아 말씀을 보고 들으며 스스로 생각하여 깨닫게 되는 이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통계시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법통계시를 받는 것은 단순히 율법만을 깨우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판단되고 규정되는 인생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번뇌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몸의 병증이 오거나 마음의 번뇌가 찾아오면, 기적을 구하는 직통계시를 받아 단순히 이를 제거하거나 망각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고통과 번뇌를 묵묵히 말씀으로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숨겨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게에 이를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육체의 한계와 마음의 짐을 오직 그리스도께 맡겨드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적을 더하는 십자가를 지는 법통계시를 받들어라
이게 바로 앞서 말한 바 믿음에 공적을 더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법통계시를 통해서 진리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을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입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주로 직통계시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라나서 소망으로 격상되기 위해서는 법통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이 법통계시의 중요성을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의 경우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 전통으로 법통계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마 직통계시자일 듯합니다. 대중들은 누굴 좋아하겠습니까? 다들 직통계시자를 좋아합니다. 예레미야는 항상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싫은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로 하나냐가 있었습니다. 하나냐는 2년이 지나면 바벨론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 예언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 예언보다 하나냐의 예언을 원했습니다. 더 달콤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상징하는 소 멍에를 목에 이고 있었는데, 이걸 하나냐가 빼앗고 부러뜨려버립니다. 바벨론이 이처럼 부서지리라고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환호성을 질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쇠로 된 멍에를 멥니다.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평화로 속이는 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냐는 금년에 죽을 것이라 말합니다. 예언한 그대로 그해 7월에 하나냐는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께 직접 받은 직통계시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법통계시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신명기 18장 20절에 거짓 예언을 하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된 것이기에, 법통계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는 것은 믿음이 자라 소망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도 얼마나 슬프고 답답했겠습니까. 자기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은 망하고, 유다 백성들은 다 죽거나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무엇을 보는가 하면, 희망을 봅니다. 그게 유명한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부터 22절 말씀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당시 모든 이들이 다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다 날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믿음이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이 영원하리라는 믿음이 예레미야에게도 없었겠습니까? 예레미야의 믿음도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른 게 하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율법의 멍에를 끝까지 지고, 모든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과 같은 십자가의 고통을 다 짊어진 사람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망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크시기에, 우리가 다 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잘린 나무 그루터기와 같아서 거기서 새순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 모질지만 끊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라는 생명력입니다. 이게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믿음이라는 영적인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라 해서 화려한 것들에 속지 마십시오. 고통을 망각시키는 것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 진짜 소망을 붙잡길 바랍니다. 고통을 직면하고 그리스도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들이 누리는 진리의 개안을 경험하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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