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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장 28-34절 새번역
28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헌법 신명기
오늘 본문은 부활에 대해서 사두개인과 논쟁하던 중 어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가장 으뜸이라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헌법을 말합니다. 우리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사실 이 전문을 가지고 개헌 시 전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정치 좌우 전영 모두 자기 논리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이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5.18 민주화 항쟁을 헌법 전문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여부를 떠나서, 이렇게 주장하는 양쪽의 생각의 공통점은 헌법 전문이야 말로 우리 민족 대한민국의 근본 뿌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헌법 전문을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를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헌법 전문에 기록된 이 뜻을 어찌 되었든지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한 국가 운명공동체에 속한 자의 필연이자 당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으뜸, 즉 하나님 백성의 헌법이자, 가장 근본 된 뿌리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신명기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히브리어로 데바림דְּבָרִים으로 말씀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euteronomy라고 하는데, 이것은 70인 역의 번역 착오에서 생긴 표현입니다. 신명기 17장 18절에서 이 율법서의 등사본이라는 히브리어를 잘못 이해해서, τὸ δευτερονόμιον τοῦτο, 풀이하자면 두 번째 율법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것을 신명기 전체의 제목으로 정한 것입니다. 다행히 한글 번역은 영어 번역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되풀이할 신(申)에 규칙 명(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여 새기고 지키라는 의미를 더하여, 원제목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약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끝낸 다음,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가 새 세대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재확인하면서 전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앞둔 상황에서, 모세는 새 세대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 이어 나갈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너희가 이 언약을 계속 이어갈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 그리고 그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을 이해하고 동의하며 실천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 신명기 말씀을 동의한다는 전제 아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헌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 배경
지난 시간 성경을 경전으로 삼은 우리 기독교 전통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법통계시를 강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 하면서 그 바쁜 와중에도 먼저 가르친 것이 유월절 예법입니다. 법이 그만큼 중요한 까닭은 법이 있고 없는지 가 노예인지, 자유인인지를 구분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권리와 의무도 없는 노예이고, 사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하던 사람입니다. 인권이라곤 하나도 없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산 것이지요. 그런 자들에게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민이 되었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통치되는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고 살아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기 땅이라곤 한 평도 없고, 인간 대접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법에 따라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 배경인 것입니다.
신명기 사관
구약을 읽을 때 염두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창조를 기록한 내용이 두 가지가 나오는데,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 차이는 어떤 사관에 기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대립하는 두 사관이 있는데, 바로 신명기적 사관과 제사장적 사관입니다. 우리 같으면 건국절에 대한 논쟁이 있듯이, 어떤 사관을 취하는지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제사장적 사관의 경우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서 찾는다면, 신명기적 사관은 이스라엘 나라는 이집트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 하던 유월절의 시작에서 찾습니다. 지금 현재 현대국가인 이스라엘은 자신의 민족국가의 건국 시점을 어디서 찾을까요? 모세 출애굽을 그 시점으로 봅니다. 그만큼 모세도 중요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살아갈 땅은 없어도 자유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명기 전체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단순히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겸손해라, 이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너의 근본이 출애굽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경우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근동에 위치한 국가의 상당수가 자신의 근원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습니다. 오늘날 경우,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이라크와 같은 아랍 국가들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깁니다. 이란, 터키를 포함한 비아랍권 이슬람 국가들도 아브라함을 공경하며 신앙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나그네처럼 산 인생이지만, 그래도 당대에 욥과 같이 의인으로 아브라함은 존경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의 근원으로 누구나 삼고 싶은 것입니다.
이브리עִבְרִי, 강을 건너온 사람
그러나 애굽의 종으로 살아간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를 자기 근간으로 삼는 나라는 이스라엘 뿐인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이브리עִבְרִי라고 말하며, 강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도시에서 살 수 없어 아무런 기약도 없이 강을 건너서 온 사람이다. 오늘날 같으면 일종의 난민입니다. 정착민이 아니라 뜨내기로서 어디를 가든 눈치 보며 기웃거리며 살 수 밖에 없는 약자들입니다. 노예, 도망자, 난민, 일부 범법자들이 모인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이 결국에는 운 좋게도 한 국가를 세웠지만, 결국 바벨론에 멸망한 다음 여러 열강 제국에 치이다가 결국 디아스포라 되어, 이후에는 나라 없는 떠돌이 인생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운지가 이제 백년도 채 안되었다. 이게 이스라엘, 히브리인, 유대인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헌법적 가치를 지닌 신명기에서는 이 사실을 이미 명확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 이면에 담겨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지와 같고 쓰레기와 같던 너희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건져주시고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힘없던 약자로서 하나님에게 사랑받은 자이니, 너희도 역시 다른 약자들을 보살피고 품어주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를 세웠다고, 힘이 있고 돈이 있고 살만하다고 해서 약자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약자였고 피해자였고 희생자였던 유대인에게 요구하신 하나님 나라는 전에 종되었음을 기억하여서, 설령 좀 손해 보고 힘이 들어도 넓은 마음으로 나그네와 외국인을 보살피고 품어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대화하시는 중 찾아와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첫 번째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들으라 하셨습니다. 들으라, 즉 신명기의 쉐마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물음에 유대의 헌법적 위치에 있는 신명기를 이야기하셨는데, 그중에서 우선적으로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씀은 앞서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처럼 신명기에서 다섯 차례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신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자는 모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십니다. 말하는 자는 하나님이시고, 들어야 할 자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항상 이스라엘은 듣는 것입니다. 유대 속담 중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헬라인은 눈으로 생각했지만, 히브리인은 귀로 생각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면, 유대 사람들은 들으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사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메시지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 거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들으면 뇌리에 남아서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머릿속에 음성으로 남아 있으면, 사람이 그 말대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습 효율에 있어서 자기 기억 대화라든지 청각적 기억으로 과학적으로도 설명됩니다. 군대에서도 명령을 내린 뒤 복명복창 하게 한 다음,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선적으로 신명기 쉐마를 말한 이유도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앞서 들으라는 말씀이 다섯 번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신명기 5장 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규례와 법도를 듣고 배우며 지켜 행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 9절에서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0장 12절에서는 들으라는 말씀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었던 것을 머릿속에 두고 뭘 이야기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말씀으로 들은 것 중에서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많은 것이 있지만,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신명기 율법, 즉 이스라엘의 헌법 정신의 근간을 설명하던 말씀이 있지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걸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알려준다고 했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첫 번째 교훈이 나오는 겁니다. 오늘 본문 3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렇게 하나님이 너를 사랑했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너희도 예전에 종 되었던 시절을 생각해서, 너의 주변에서 노예와 같이 난민처럼 살아가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무시하지 말고 사랑하고 도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31절 두 번째의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결국 하나님께 사랑받았으니 너희도 사랑하는 말씀이야 말로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근본 헌법 정신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왕이라도 신명기 율법은 지켜야 한다
이 이야기를 잠잠히 듣던 율법학자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복음서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심지어 본문 앞에서는 율법학자인 사두개인과 부활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만큼은 예수님을 반대했던 율법학자조차도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 하나같이 침묵하며 예수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무너진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신명기에 담긴 유대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근원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자는 결국 스스로가 유대인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명기 율법은 엄중한 것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명기 사관은 왕정시대에 이르러 소위 예언자 전통을 이룹니다. 당시 선지자들은 직통 계시를 받아서 왕에게 나아가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법통계시, 즉 신명기 율법을 따라서 왕의 잘못을 따지고 비판했습니다. 왕이 신명기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유대 정체성도 없고, 유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자라 취급하여 저주받은 자로 여기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럼 왕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표적으로 엘리야가 아합 왕의 패역함을 고발하다가 이세벨에게 괴롭힘 당했던 것이고, 이사야가 므낫세 왕을 비판하다가 톱에 잘려 죽은 것입니다. 왕이라도 신명기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오늘날 같으면 대통령도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서슬 퍼런 법의 정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쓰인 희랍어는 우리가 잘 아는 단어인 아가페입니다. 신적이고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말인즉,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한 마디로 하면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남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나 못하는 일이고, 만약 누군가 행한다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교 본문의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는 그렇다면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을 역으로 던집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도 ‘나의 이웃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질문을 놓고 논쟁이 심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민족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시절 이후로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 기존에 남아 있던 사람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혈이 심했고,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특히 그리스 사람과 혈연적으로 많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비단 자신들의 시대만이 아니라, 애굽 노예 시절을 보더라도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으로 내려오는 혈연 공동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애굽 포로기 시절 당시 많은 잡족들이 함께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고, 출애굽 시 이들과 함께 나오면서 이스라엘 안으로 흡수가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 이후에도 가나안 여러 민족들이 이스라엘 안으로 많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혈연적으로 이웃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대신 지리적으로 근접한 사람들을 이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고대 시대에는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친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인구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비워진 옆 땅으로 사람들이 이주해서 또 다른 동네를 이룹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웃 동네와 경쟁이 붙고 다툼과 전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가까운 이웃일수록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웃이란 말과 원수라는 말이 다를 바 없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면, 우선 반대로 원수를 이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미워하는 원수일 수록,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멀리 나를 공격하는 원수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는 말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에는 같은 근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자신의 공통된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이라 여겨지는 이스라엘 신명기 헌법인 것입니다. 이름 없는 잡족으로 나그네처럼 살아온 인생이지만,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로 강을 건넌 자들,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혈연도 아니고, 지리적 근접성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을 맺었다는 그 사실, 같은 신명기 헌법을 공유하는 그 사실이 내 이웃을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나의 근원을 찾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답을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나의 근원을 위해 죽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완전히 다른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근원을 둔 사람들,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근원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근원을 위해서 희생함으로, 나의 근원이 나의 흘린 피와 희생으로 더 많은 생명과 복을 누리게 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 하나님 자녀라는 공통분모로 인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근원성에 대한 자각과 인정이 결국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체성이 명확하고, 그 주체성에 따른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고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아가페적 사랑, 상대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능한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적 사관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생각해볼 때, 십자가는 단순히 희생하고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의 욕망을 부정하고 나 자신을 없애고 제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정체성을 찾아 더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내가 누군지 알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근원적 정체성에 합당한 행위를 통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쉽게 죽으라는 말도 아니고, 제대로 알고 멋지게 죽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정체성이 주어졌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으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근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헌법입니다. 다른 것 다 빼앗아가도 이게 마지막 남아 있는 가장 귀한 자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헌법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자녀의 권리와 의무를 멋지게 행사하다가 존귀하게 죽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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