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9장 1절-6절 새번역
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러, 광야에다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아래에 장막을 친 다음에,
3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언약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시내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게 하시며, 애굽의 모든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마르거나 힘이 들거나 조그마한 어려움이 생겨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사실 출애굽 후 2개월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들이 과연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아브라함에게 맺은 언약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과 한 개인이 언약을 맺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시내산 사건은 하나님이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와 만나십니다. 오늘 본문 이후 출애굽기 19장 11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 장소에서 수많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전무후무한 사건들이 많지만,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장면이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개인적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은 한 개인의 안녕과 보호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네 이제는 이스라엘과 집단적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을 때, 단지 언약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언약하신 이후에 이들이 언약의 주체가 되도록 훈련시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그 인생 중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언약을 맺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겠다는 확약을 하도록 합니다. 언약에서 상호적인 책임을 분명히 명시하신 것입니다.
상호 책임을 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리하고 힘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냥 어떻게 하든지 관계없이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면, 관심끄고 있다가 어려울 때 가서 잠시 잠깐 도와주면 됩니다. 그런데 상호 책임을 물으며 언약의 주체가 되도록 훈련하는 일은 몇 백배 더 신경 쓰이고 힘든 일입니다. 계속 잘 하고 있는지 봐줘야 하고, 못하면 가서 가르쳐주고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자신을 제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스스로를 묶고 그들의 운명에 자신을 연루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모든 것의 근원이시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굳이 자기를 제한하시면서까지 언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으로 엮인 사이가 되다
하나님이 언약하시는 모습은 하나님 당신이 단순히 세상을 만들어 놓고 멀리 계신 초월자가 아니라, 인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만들어 놓은 뒤 내버려 두는 게 아니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맺으시는 언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일종의 책임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부자유해집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언약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언약을 맺은 후에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곧 하나님의 운명이 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매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의 기쁨과 슬픔이 부모의 것이 되듯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기도 하시고, 그리고 잘못에 대신 책임도 지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분노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십니다. 홀로 눈물을 흘리시기까지도 하십니다. 선지자들의 분노와 눈물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결국, 언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결국 가장 큰 희생을 치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먼지와 같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있습니다. 비록 어둠과 혼란이 지배하는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언약이 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마치 결혼처럼 두 사람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깊이 엮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듯 언약 백성을 훈련시키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출애굽기에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떻게 인도해 내셨는지를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부터 1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만나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로 받듯이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묘사합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공중으로 떨어뜨린 뒤 날개로 받아 올려 훈련시킵니다. 새끼가 날개에 힘을 가지고 담력을 키워 하늘을 날아올라 갈 수 있도록 강하게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게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방식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하늘로 밀어내어 스스로 날게 훈련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워 홀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의지하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목사의 설교만 듣고, 언제까지 교회 안에서의 사역만 하다가 인생을 마칠 것입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교회 일이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목사의 설교를 듣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를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혼자 말씀을 보고 읽으며 기도하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광야와 같은 이 땅에 홀로 던져지더라도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홀로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5절과 6절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온전히 서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주체적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즉 하나님이 아끼는 보석처럼 특별하고 가치 있는 소유가 될 때에 진정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무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면, 결국 세상의 소유가 되어서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언약을 잘 지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보석과 같은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선 5절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인데,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으며, 주님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속여 우리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도록 유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살면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단이 일부 권세를 잡고 있으나, 불순종하는 자들 안에서만 역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사단도 영원한 심판을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결국 그리스도로 통일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당당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주체자로서 존엄한 제사장과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가운데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속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성전과 제사장이 있었고 매일 짐승의 피를 흘렸지만,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언약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의 삶이 거룩해야 백성들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제사드릴 수 있습니다. 제사장 본인이 언약에 불충한데, 어떻게 온 세상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유효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백성은 거룩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단순한 지식이나 이론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온전하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역량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은 아니니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구원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 신학의 새관점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날 바울 신학에서 새관점New Perspective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샌더스라는 학자가 주장했는데, 이것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바울의 기존 옛 관점은 율법을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율법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 실패, 율법과 은혜의 상반됨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샌더스에 따르면, 실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렇게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들이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범해도 또 다른 속죄의 율법인 제사를 통해서 언제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기에 율법은 결국에는 은혜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은혜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그 은혜 아래 머물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율법을 토라라 말하며 이스라엘의 법조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토라는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가 핵심인 구원의 선언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은혜의 언약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정죄의 법조문으로 받아들일지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 하나님 백성은 율법이 은혜의 언약일 줄 믿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에서 율법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며, 시편 19편은 여호와의 율법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라고 고백합니다. 율법은 딱딱한 규제가 아니라,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자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율법은 구속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내산 언약은 우리에게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언약을 맺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찬송하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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