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5장 15절 - 6장 1절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by 알렉스강 2024. 7. 26.

출애굽기 5장 15절 - 6장 1절 새번역

 

15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어찌하여 저희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16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17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18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너희에게 짚을 대주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는 벽돌을, 맡은 수량대로 어김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19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은 매일 만들어야 하는 벽돌의 수를 줄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이 곤경에 빠졌음을 알았다.

20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21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22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23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강한 손에 밀려서, 그들을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서야, 그들을 이 땅에서 내쫓다시피 할 것이다."

 

 

신앙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용기를 내서 일을 진행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담력을 얻어 결단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고 했는데, 예상과 다른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했는대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공격해 옵니다. 이럴 때는 믿음에 회의가 생기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과 현실의 차이로 인해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일상에서 바로 적용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신앙은 현실로부터 받은 아픔을 위로받는 곳이고,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는 일반 사람들처럼 돈이나 사람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로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고 더 강하게 말하긴 했습니다. 물론 모세의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의 반응이 좋지 않자, 모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더 강하게 반응하며 모세의 말을 무시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무시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보고 더 강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모세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키워라

우리의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 해도 다 그 뜻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일조차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어렵게 진행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실수 없이 행하더라도, 결론은 우리의 기대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영광보다는 오히려 십자가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을 길러가는 것이 기도이고, 이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경우, 바로에게 나아가기 앞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이미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지 않을 동안에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사리 보내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적을 통해서 애굽을 치게 되면, 그때야 보낼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이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후회할 일이 생겼을 때, 아차 하면서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내가 그냥 흘러들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모세처럼 우리도 동일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꼼꼼히 기억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신 낙담하지 않으면 됩니다. 첫술에 누가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실수를 통해서 신앙을 배워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대했던 바와 다른 결과를 마주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고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실망과 모욕만 당합니다.

 

마주하는 문제 앞에서 사람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자 사람을 찾습니다. 그것도 바로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15절과 16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어찌하여 저희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작업반장은 억울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애굽의 감독관이 매질을 하는 것이 너무나 부당했습니다. 벽돌을 정해진 기한 내에 어떻게든 무리해서 만들더라도, 최소한 작업 환경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매질하니, 일부로 때리려고 작정한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를 찾아가 감독관들의 만행을 고발하면, 바로가 잘못된 부분을 고쳐줄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바로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17절과 18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너희에게 짚을 대주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는 벽돌을, 맡은 수량대로 어김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부과된 터무니없는 부당한 요구가 애굽 감독관들의 몰상식한 생각이 아니라 바로의 의중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라는 내가 듣도보도 못한 신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소유인 히브리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 것에 분노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앞세워 꾀를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게을러 터져서 일하기 싫으니 자기 신들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수작을 부린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잔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더 가혹하게 해서 딴 생각 못하도록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이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했습니다. 참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리석을 때가 많습니다. 애굽 사람들로 인해서 히브리 사람들이 고통받는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애굽 왕 바로에게 호소한다고 히브리 사람들 편에 서겠습니까? 애굽 왕 바로는 애굽 사람 편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이민족을 노예로 다스리는 정책을 통해서 나라를 운영합니다. 그렇다면 바로가 그 중요한 정책을 히브리 사람을 위해서 결코 폐기하겠습니까? 바로에게 찾아간 것은 번지수를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늘의 임금이 아니라 세상의 임금에게 찾아가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국가와 정부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필요를 요청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은 다릅니다. 영적인 부분을 세상에다가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이 세상의 국가나 정부와는 한 배를 탈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오히려 정치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이나 실패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국가와 정부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은 필요하나, 국가와 정부를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본질적으로 서로 건널 수 없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이 차이를 깨닫게 되면, 국가나 정부에 교회의 필요나 문제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어리석은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세상의 목적은 다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가지는 낙관적인 기대를 버리십시오. 국가나 이 사회가 나를 책임져 준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저 수단일 뿐입니다. 이처럼 바로로 대표되는 세상은 철저히 결과 중심적이고 목표 지향적입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벽돌 몇 개 당장 찍어내라, 그럼 끝입니다. 재료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건 내가 알바가 아니다. 주어진 기한까지 목표 달성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죽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바르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제시하는 목표는 몇몇 힘이 있고 가진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결국에는 돈입니다. 사람들을 생존을 이유로 돈에 매이게 해서 종으로 삼아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물론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원래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목적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면 나 자신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고, 나 자신을 쾌락으로 끌고 가는 게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인생의 첫 단추부터 다르게 끼우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백성은 그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목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순하디 순한 양처럼 어리바리하다가 결국 사람들에게 치이고 세상에서 도구처럼 쓰이다가 버려지는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의 모략과 권세

세상으로 상징되는 바로를 보십시오. 바로는 자기 목적을 위해 매우 치밀하게 계략을 가지고 몰아붙입니다. 19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은 매일 만들어야 하는 벽돌의 수를 줄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이 곤경에 빠졌음을 알았다.” 일절 봐주지 않고 몰아붙여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꼼짝달싹 못하도록 곤경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모두 다 모세와 아론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쓸 때 없는 희망을 갖게 하여 괜한 소리를 해서 우리가 더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문제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는 수법이 보통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갑질하는 사람들은 을인 상대방을 서로 싸우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자기 잘못은 말하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들추어내어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희생양을 만들어 본보기로 처절하게 죽인 다음에 두려움게 하여 다시는 고개 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사실 정확하게 보자면 틀린 말입니다. 언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의 생사 결정권이 있었습니까? 원래부터 바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다시 확인했을 뿐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로에게 자신들의 생사 결정권이 넘어가게 된 것인 양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바로의 말을 잘 들어야지 목숨이라도 살 수 있지,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처절한 현실을 마주한 것입니다. 신앙과 현실의 차이를 직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현실에 복종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런 문제를 고민조차 하지 않겠지만, 신앙이 좀 자라면 바로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현실에 무릎 꿇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저 위로이고, 현실 문제는 돈이나 인간관계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가 원하는 결론이고,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너희들을 좌우지하는 힘이 현실 세계의 권력에 있는데,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는가 하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실재적인 압력과 부당함을 행사하여 세상은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분노와 원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다

모세도 답답했을 것입니다. 모세 역시 현실을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원망이 잔뜩 썩인 온갖 욕을 다 듣고 와서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탄식합니다. 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어서 안 그래도 힘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게 하시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가서 말했을 뿐인데, 바로는 변하기는커녕 완고해져서 더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답답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만 해놓고 아무것도 한 것 없지 않나며 원망한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백프로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보다는 믿음이 성숙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 권세자에게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 본인도 백성들한테 삿대질당하고 욕을 얻어먹었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면서 자기 분노를 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분노를 가만히 담아 두지 않습니다. 분노를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인생이란 문제가 있기에, 살면서 분노가 생길 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분노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증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쌓여 있다가 결국 폭발합니다.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하고 착한 척한다면 결국 위선에 빠지고 맙니다. 아니면 속병이 나서 자기 명에 못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나아가 맞아서 상처 난 나의 아픔과 분노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동기와 에너지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내 안에 있는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다 토해내야 합니다. 시편 기자들을 보면, 세상과 악에 치여서 그 모든 울분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습니다. 그것이 기도가 되고 노래가 되어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가만히 두면 나를 헤치고 타인을 헤치게 하는 악한 에너지를 거룩한 에너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의 미디안 광야의 훈련으로 이것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장 1절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강한 손에 밀려서, 그들을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서야, 그들을 이 땅에서 내쫓다시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에게 보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 주인이 이 땅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나타낼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내가 하는 일을 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치 못해 종종 세상에 겁먹으며 주님 보다 세상을 존중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은 멀고 세상은 가깝다 생각하며 내 한 몸 편하자고 이익을 쫓아가고자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리고 세상 권세에 맞아서 아파하고 분노하고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놓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세상이 더 거세게 우리를 몰아붙이고, 기도하였음에도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답답할지라도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 반드시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주님의 역사와 섭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