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6장 2절-13절 새번역
2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4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5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
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7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나는 주다.'"
9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10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나라에서 내보내라고 하여라."
12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이스라엘 자손도 저의 말을 듣지 않는데, 어찌 바로가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13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하셨는데, 이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알리고 이집트 왕 바로에게도 알리라고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셨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출애굽 사건
출애굽은 결코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애굽은 당대 최고의 제국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여러 제국들의 경우는 주로 타민족을 침략하여 약탈 경제로 제국을 유지했습니다. 이와 달리 애굽은 자체 생산력이 워낙 좋다보니 이를 기반으로 이민족 노예 제도를 통해서 경제와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 인구가 애굽 사람들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애굽의 국가적 사업에 총동원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을 출애굽 시키는 것은 이런 기반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일인데, 제국 통치자인 바로가 어떻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애굽에 거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적어도 이백 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낸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출애굽은 유대인들이 지난 사천 년이 넘는 동안 자신의 민족과 신앙을 지키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출애굽은 사람이 감히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이룬 구원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을 인간의 역사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과학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도 결코 사람이 한 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 스스로 구원해 보라 말합니다. 우리는 단연코 출애굽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라는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마주쳐 인간의 무능력과 불가능함에 대해서 토로하는 것은 그저 먼지와 같은 우리 인생에 대한 정직한 직면입니다.
나는 주다, 나는 여호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다독이십니다. 모세가 정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도 가만히 있으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끝내 포기했다면, 다른 누군가를 또다시 준비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순종하겠다는 모습을 보시고 모세를 격려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순종할지 불순종할지 이 중심을 보십니다. 만약 불순종하려면 인간의 의지를 어떻게 꺾어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반대로 끝까지 불순종하며 버티면 결국 은혜를 거두시어 다른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구원의 섭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변치 않으셨고, 변치 않으실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할 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걸면서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기 이름은 바로 “나는 주다”, 정확하게는 "나는 여호와이다"라는 말입니다. 6장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무려 5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방법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누가 너를 보냈는지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는데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모세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다시 반복하시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 모세의 순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이시자, 섭리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주다, 나는 나다라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있다, 있게 하다, 즉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가 그분으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기 위한 모든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과 공간의 창시작인 하나님은 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 인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 한계 속에서 생로병사라는 인간사를 다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행복하든 고난에 처하든지 결국에는 정해진 년수대로 그 안에 갖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초월하는 것이 궁극적인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만드시고, 그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존재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으로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게 하는 하나님 말씀
시공간에 갇힌 우리가 부족함과 결핍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시공간에 제약된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육체를 넘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까지입니다. 결국 육신을 넘어서 영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인지에 대한 답이 여기 있습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생을 초월의 길로 인도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 간의 연결고리는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지키십니다. 이 약속이 변함없이 유효하기 때문에, 유한한 우리 인간도 말씀에 따른 약속으로 영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연결되며, 그리고 부족하지만 이 약속을 지켜나감으로써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짐승과 구별되고 짐승보다 나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오염되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인간은 교만해지거나 죄악으로 빠집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일삼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많아진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의 타락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땅의 정치지도자 권력자들이 국민들 앞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공정과 상식을 말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한 선택적인 공정으로 구부러진 정의만을 내세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 말에 하나님의 영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말을 아끼고,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정의에 대한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적 의미인 구원
3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전에는 알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창세기 여러 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말씀하시거나, 이들이 여호와라고 이름을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부르게 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이 담긴 그 깊은 뜻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가장 깊은 뜻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 나라라는 구원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있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구원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역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약속의 이행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말을 한 다음, 그 말대로 이행하면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 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하나님이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약속이 이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성취하게 되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조 사건이 됩니다. 따라서 언약의 이행은 달리 말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인 속량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기에, 이 일은 하나님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이 일을 바로가 막아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 일을 성취하시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라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애굽으로부터 끌어내어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속량해야 합니다. 속량이 바로 소극적인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핵심 단어로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빼낸다', '건진다', '속량 한다'. 이게 모두다 뭔가 무거운 짐 밑에서 우리를 빼내는 것입니다.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채무 관계에 의해서 종속된 종과 노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 된 삶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기 위해 값을 치러야 합니다. 누가 값을 치루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시고 되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누리는 구원은 종이 아니라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착각해서, 신분의 변화보다는 소유의 변화를 누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잘 보여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이 세상의 노예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큰 집에 사는 노예, 큰 차를 굴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의 변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변화를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인 안식
그런데 구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이다.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관계야 말로 적극적인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 일종의 창조 사역이라 말했습니다.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언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새 창조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새 창조임을 알리고자 출애굽 시 유월절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민족의 달력이 바뀝니다. 달력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경험한 새로운 피조물에서, 이제는 과거와 달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새 창조를 다른 말로 하면 안식입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거운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놀고먹고 자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새 창조의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자는 새로운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새로운 달력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절기를 따르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는 결코 타협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을 단순히 쉬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식일은 이 땅의 질서를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시공간에 갇힌 우리의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진리로 초월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걸고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알지 못하기에 새 창조라는 구원을 누리지 못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세상의 권위 앞에서 기가 죽었습니다. 결국 이 땅의 질서,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한 것입니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모세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바로의 말이 더 크고 무섭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막힌 귀를 뚫어내듯이,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굳어진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경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봐도 참으로 답답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쉽사리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답답한 존재들을 데리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그분께서 그분의 계획대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방식대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정치적이고 과학적이고 문화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했으나 좌절한 모든 인새의 문제들을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여호와라는 자기 이름을 통해서 인생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가장 본질적인 해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십니다. 나의 이름을 걸고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름에 담긴 비밀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 위세에 눌리고 동족 이스라엘의 삶이 더 힘들어지자 좌절하고 낙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가가셔서 친히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내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듭 반복하면서, 내 이름을 걸고 이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내 명예를 걸고, 내 생명을 건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각오를 보여주셨습니다.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결의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인지 여호와 하나님인지를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하나님 편이 아니라 세상 편에 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어둠의 권세에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구원, 즉 속량의 은혜와 안식의 기쁨을 누리며 새 창조의 존재로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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