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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2장 1절-10절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by 알렉스강 2024. 7. 17.

출애굽기 2장 1절-10절 새번역

 

1 레위 가문의 한 남자가 레위 가문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3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4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5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 오게 하였다.

6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7 그 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8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10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그 아들이 너무 잘 생겼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한 가정에 머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레위 족속의 한 남자가 친족의 여자와 결혼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평범한 가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 20절에 따르면 이들은 아므람과 요게벳으로, 이미 미리암과 아론이라는 두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멸절시키고자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이 있은 이후 이 레위 가정의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너무 잘 생겼기에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숨겨서 살리고자 마음먹습니다.

 

여기서 '잘 생겼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신 표현과 동일합니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서 천지 창조의 기운을 느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창조, 즉 구원의 시작을 암시합니다. 히브리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 뒤에 태어났기에, 세상적으로는 저주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생명의 탄생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고귀한 것입니다. 부부는 아이의 탄생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 믿고, 그것을 좋게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좋은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고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의 시선과 달리 모든 것이 좋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거부하는 십자가나 고난과 아픔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결국에는 좋은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기준에서는 나쁘고 불운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결국 참된 생명을 주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산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출산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따라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낳는 일이 결국에는 멋지고 보람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내 아이를 볼 수 있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출산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아이를 갈대상자에 숨기다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겼습니다. 100일이라는 시간은 아이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부부는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습니다. ‘숨겼다’는 히브리어 단어 ‘차판חָפַן’은 무엇인가를 덮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로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세를 덮은 것입니다. 100일이 지나자 더는 숨겨둘 수 없었습니다. 보모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갈대 상자를 준비해 아이를 담아 나일 강가 주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갈대 상자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생각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익사하거나 악어에게 잡혀 먹힐 운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테바תֵּבָה'로, 노아의 방주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갈대상자와 방주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속에서 생명을 보호했듯이, 모세의 작은 상자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생명을 보존합니다. 둘째, 홍수 심판이 끝난 후 새로운 세상이 방주에서 시작되듯이, 갈대상자는 죽음을 넘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출발점이 됩니다. 셋째, 갈대상자는 노와 키가 없어 방향을 스스로 잡지 못하고 물에 둥둥 떠다닙니다. 방주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선장이 되어 갈대 상자를 이동시키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도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물로 가득 차 삼켜질지 모를 세상에서 보호받을 유일한 길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이른다

모세를 담은 상자가 나일 강에 떠내려가다 어딘가에 멈췄습니다. 마침 그곳에 바로의 딸이 와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대 상자를 열어본 바로의 딸은 히브리 아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목숨을 구해주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려는 마음처럼, 바로의 딸도 모세를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히브리어 동사 ‘하말חָמַ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약한 사람을 돕거나 생명을 위협받는 자를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도 노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불쌍히 여김에서 시작됩니다. 불쌍히 여겨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자존심 상할 수 있으나, 이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모세가 인간적으로 잘나서 바로의 딸이 구해준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애처롭고 불쌍했기에 긍휼 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놀랍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에게 임한 긍휼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겉보기에는 우연이나 운명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애굽의 공주는 아버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히브리 아기 모세를 구해 키웠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람세스 2세의 딸 이름이 하셉수스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고, 겨우 얻은 딸마저 일찍 죽었습니다. 이러한 자식에 대한 갈망이 아이를 입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모든 인간의 변수를 누가 조종하고 계획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 아래 모든 것이 들어맞는 이 상황을 우리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공주는 히브리 아기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살리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제국의 심장에서 제국을 멸할 자가 나오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상자에 모세를 담아 두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공주가 상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보고 공주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녀는 바로의 딸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소개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공주의 허락을 받고, 미리암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공주에게 유모로 소개했습니다. 요게벳은 다시 모세를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바로에게 양육비를 받으면서 모세를 키웠습니다. 젖을 뗄 때까지 키웠다고 했지만, 이는 모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키웠음을 의미합니다. 요게벳은 모세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가르쳤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성인이 될 무렵 합법적으로 바로의 궁에 입성해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따르면,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워 말과 행동이 뛰어났습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초를 애굽 궁정에서 배운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제국의 교육이 모세 오경을 기록할 수 있는 지성을 훈련케 했고,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끄는 지도력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죽이려 했던 바로의 궁전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훈련시킨 것입니다. 제국의 심장에서 제국을 멸할 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지혜롭고 놀랍습니다.

 

물에서 건저 낸 자, 모세

바로의 공주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 지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져내다'는 히브리어로 ‘마샤מָשָה’입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아이가 억압과 압제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사람이 됩니다. 메시아라는 단어도 모세처럼 마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 인생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강에 던져진 아기 모세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도 갈대 상자에 실린 것과 같습니다. 얼마 동안은 물이 막혀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물이 스며들어 상자가 가라앉게 됩니다. 내 삶의 방향도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죽음 가운데서 건져주십니다. 공주의 마음에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긍휼로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로 전적인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는 자가 되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원받은 까닭은 구원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누군가를 건져내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를 치유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있었다면, 그것을 이겨낸 사람만이 같은 고난을 겪는 사람을 도와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단순히 내 상처 하나 치유받고, 나 하나 구원받았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건져내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고,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건저내셨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곳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누구도 편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만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눈 앞에 있는 일로 흔들리지 말길 바랍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이렇게 초지일관하는 마음을 깨닫고 행할 때,  믿음의 눈이 온전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