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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1장 8절-22절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by 알렉스강 2024. 7. 17.

출애굽기 1장 8절-22절 새번역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9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10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13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

15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16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17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18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19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21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22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오스카 쉰들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 넘어 온 시기는 이민족인 힉소스 족이 애굽을 통치하면서 애굽 15 왕조를 열었던 때입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 이른 것은 본인의 탁월한 역량도 있었지만, 이민족 왕조이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이민족들도 우대한 정책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야곱의 가족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민족 단위로 성장하였습니다. 역사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애굽의 본토민들이 이민족들을 몰아내고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습니다. 8절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이스라엘을 학대한 애굽의 바로가 바로 본토민이 세운 19 왕조의 세티 1세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후 모세와 대결한 바로는 이후 등극한 람세스 2세라고 합니다.

 

9절과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에 사는 본토민들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여서, 혹시 새로운 이민족이 쳐들어와 함께 합세하여 자신들을 몰아낼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첫 번째 내세웠던 정책은 고된 노동과 부역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라고 말합니다. 일을 엄하게 시켜서 어려운 노동으로 생활을 괴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고강도 노동을 통해 출산율을 저하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일이 지혜롭게 한 현명한 결정이라 여기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결정으로 반대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12절과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근육은 쓰면 쓸수록 더 강해진다고 하지요. 고강도 노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건강해져서 출산율이 더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얄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라고 말합니다.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게 하고 농사도 짓게 했습니다. 아예 쉴 수없도록 노동을 시켜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종의 노동착취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해놓고 마구잡이로 노예로 부려 먹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멸절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이익을 탈취하고자 함이 아니라 고된 노동으로 죽여서 씨를 말리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백성을 죽이고자 덤벼든다

출애굽기를 볼 때, 중요한 관점 중 하나가 구속사적 모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굽은 죄악 된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것은 우리의 구원과 대응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한 후 광야에 있을 때를 보면, 자주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먹는 것 걱정 없었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면, 만나가 지겹다고 말하며 애굽에선 불가마 옆에서 고기를 먹었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역에 시달렸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멸절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내가 괜히 교회를 다녀서 삶을 즐기지 못해 불편하다, 내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달리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결코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위해주지 않습니다. 교회나 같은 성도들이 걱정해 주고 도와주지, 세상은 철저히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버리거나 죽입니다. 그게 세상의 문법입니다.

 

20절에서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약자들을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어 출산율과 생존율을 증대시킵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값비싼 것을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구하기 힘들고 부드럽기만 한 것을 먹으면 오히려 약해집니다. 값싸고 거칠더라도 단순하면서 신선한 음식을 먹는 것이 우리 건강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마음 것 먹을 수 있도록 세상에 많이 두셨습니다. 약자들을 번성케 해서, 강자들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흑인들의 권리가 강해진 것은 출산율이 백인들보다 앞서 선거인수가 무시 못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히스패닉계가 늘어나서 이민정책을 바꾸고 있다고 하지요. 약자는 힘이 약한 대신 숫자로 맞서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올바른 관점
영적인 지혜 중 하나는 고난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며,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성장과 번성을 이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긍정적인 신호이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난은 시험을 주고, 우리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힘든 시간을 겪고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유지합니다. 동시에 고난의 이유를 탐구합니다. 혹시라도 고난의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의 이유는 특별히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낮과 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만 존재하는 삶을 원하는 것은 무리이며, 고난은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감사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자, 실수가 없는 존재로 믿습니다.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깁니다.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고된 노동에 의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출산율을 강제로 낮추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인들이 아이를 낳을 때 딸은 살려두지만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권력으로 강요한 불의한 명령입니다. 때론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받게 되고 이에 응하게 됩니다. 세상이 준 불의한 명령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무비판적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보다 더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양심에 어긋남 없이 행해야 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생명을 낳는 산파가 될 것이냐 생명을 죽이는 산파가 될 것이냐에서 그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잦으니까 바로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가 묻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러자 산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산파들의 말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실제 히브리 여인들이 강해서 아이를 잘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들을 살리려는 두 산파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조치하셨을는지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두 산파는 아이들을 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불의와 맞설 때, 하나님은 우리가 부끄럽거나 곤란한 처지에 처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이 때로는 거짓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색 거짓말은 용납이 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보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이 더 높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자들의 거짓말에 대해서 강자의 거짓말과 같이 동일하게 취급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자들의 거짓말은 살고자 하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약한 자들의 절박함을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십니다. 

 

먼지와 같은 유랑민인 히브리 사람들

여기서 히브리인들이라는 단어가 언급됩니다. 히브리란 말의 유래 중 하나가 압피루אֲפִירִים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압피루는 먼지와 같은 존재로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중근동의 여러 지역을 떠돌면서 노역이나 용병으로 고용된 최하위 계층들입니다. 유럽의 집시와도 같은 것이지요. 출애굽기 12장 37절과 38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처럼 이스라엘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먼지와 같은 여러 잡족 유랑민들이 모여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약자들의 하나님, 먼지와 같은 유랑민들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약자를 상징하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선대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이스라엘에 처음 계시되었던 하나님이 바로 히브리인의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낮은 곳 누추한 자리인 마구간 구유에 나셨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빈민들을 보시면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병을 치유하시고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숫자가 어느 정도 되지만 힘이 없는 유랑민들은 항상 경계와 학대의 대상이 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기회만 되면 멸절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바로의 압제가 바로 이런 일입니다.

 

먼지라도 저항할 수 있다

성경은 아무리 연약하더라도 세상에 저항한 자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성경은 애굽 왕 바로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아도 산파 이름을 남겼습니다. 바로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부아는 찬란함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권력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서 있음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저항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산파들이 결과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행동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결과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했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두렵더라도 대응하며 내가 해야 할 것을 행동하는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견디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 작은 저항이라도 하는 것, 최소한의 것이라도 하는 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우리가 약하지만 저항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약함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릅니다. 약할 그때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그 어떤 강한 세력 앞에서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그릇 공장을 불하받아 군수공장으로 키웁니다. 그리고 군수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숙련된 기술자라는 명목으로 유대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고용하기 위해 자기 돈과 물건을 팔아 독일군에게 뇌물로 줍니다. 이런 덕분에 이 공장에서 일했던 1,200명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유대인들을 돌려보내며 한탄을 합니다. 그는 울면서 자기의 승용차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10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의 시계와 결혼반지를 팔았더라면 유태인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몇몇 노동자들이 쉰들러의 의로운 행동에 감사하며, 자신의 금니를 녹여 만든 금반지를 선물합니다. 그 금반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 격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믿음은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바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막장까지 갑니다. 22절이다.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체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다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덤벼듭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면 살려두고, 듣지 않으면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 세상의 본심입니다. 세상은 순간적인 쾌락과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유혹하면서 자기 말을 듣는지 봅니다. 듣지 않으면 바로 죽이고, 들으면 이용해 먹다가 버립니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모습은 우리를 노예로 구속하고 죽이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전멸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죽이고자 덤벼도, 우리가 저항하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바로의 압제로 멸절될 수 있는 위기 가운데, 하나님이 한 명의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바로 물에서 건져낸 사람 모세입니다. 쉰들러에게 준 반지에 적힌 탈무드 격언처럼,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한 민족을 구하고 결국 온 세상을 구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깨닫게 됩니다. 끈질김입니다. 잡초와 같은 생명력입니다. 곧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남습니다.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고 길게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습니다. 핍박하면 할수록 더 견디어 냅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버티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게 아니라 버티는 것, 견디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각자 인생에게 주어진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완주하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