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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3장 13절-22절 나는 곧 나다

by 알렉스강 2024. 7. 20.

출애굽기 3장 13절-22절 새번역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16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일러라.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하고 말하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내가 너희의 처지를 생각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는 일을 똑똑히 보았으니,

17 이집트에서 고난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하여라.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19 그러나 내가 이집트의 왕을 강한 손으로 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수 온갖 이적으로 이집트를 치겠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21 나는 이집트 사람이 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여, 너희가 떠날 때에 빈 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겠다.

22 여인들은 각각, 이웃에 살거나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이집트 여인들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너희 아들딸들을 치장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이집트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갈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모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화두가 무엇이냐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이름의 뜻대로, 백일이 되던 날 애굽 어느 강 갈대 사이에서 바로의 딸의 눈에 뛰게 되어 건짐을 받게 됩니다. 이후 애굽의 왕가의 일원으로 길러지게 되지요. 그리고 누이 미리암의 기재로 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둘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젖을 뗄때까지 키우다가 애굽 왕실로 보내졌다고 하지요. 젖을 때는 시기는 당시 성인식을 치를 십이삼 세 정도의 나이를 말합니다. 이 정도 시기까지 유모이자 친모인 요게벳에게 길러졌기에, 모세는 자연스럽게 그 기본 근간에는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어릴 적 보고 먹고 배운 것들이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힙니다. 그래서 어릴 적 자라온 환경이 중요합니다.

 

이후로 왕궁에서 애굽의 학문을 배우며 궁정 예법을 익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세대에 해당하는 30년 가까이 애굽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혈통으로는 히브리인이지만 신분으로는 애굽인으로 살아가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애굽 궁정 생활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정체성의 혼란이 생깁니다. 입양아의 경우 항상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이런 점입니다. 특히 해외 입양을 한 경우 내가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큰 충격에 빠집니다. 히브리인도 아니고 애굽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세가 직면했을 때,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의 동포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살해한 것도 정체성 혼란에 따른 우발적 살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당시 후계문제로 인해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봅니다. 법적으로는 공주의 아들인 모세가 애굽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혈통이라는 자기 출신의 한계로 인해 결국 권력승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모세는 자신과 경쟁하다가 결국 권력을 승계하게 된 바로의 눈에 벗어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도망을 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도 아니고 애굽 사람도 아니다

모세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 도망쳤지만, 도망친 미디안 광야에서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졸지에 애굽 왕자에서 광야의 목자로 신분이 급추락한 모세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로서 지낸 40년의 시간이란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처럼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나의 존재 목적을 알아야지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동물과 달리 하나님 형상으롤 지어진 인간이 가진 특권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모르고 오로지 나의 욕구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11절을 보시면,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라고 모세는 반문하지요. 나는 애굽 사람이 아니기에 바로에게 가서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모세는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으로도 인정 받지 못하기 때문에, 출애굽 하자고 해도 이스라엘 자손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래도 못하고, 저래도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 자신은 이쪽 저쪽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너는 누구인지를 묻고,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묻습니다. 정치적으로 여당인지 야당인지 묻습니다. 지역적으로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묻습니다. 학교가 서울인지 지방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편 가르기를 한 다음에 서로 싸우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소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편 가르기 하기 앞서, 우리의 근본적인 소속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굽 사람도 아니고 히브리 사람도 아니면 뭐냐,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모세가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첫 번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하나님은 14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개역개정 번역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른바 부동의 원동자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어떤 조건이나 이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부모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고, 우리 부모도 그 부모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그 원인과 기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절로 존재하는,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름으로 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분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잠시 잠깐 드러내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다 쉽게 말하는데, 사실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온 우주의 먼지 하나 정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돕는다거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하는 것도 착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나서서 결단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단지 우리는 인생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사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을 찾아서 세우시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로 들어가 그분의 작은 도구가 된다면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두 번째,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다

그런데 나는 곧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드러내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모세에게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너의 소속이 어딘지를 물어보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소속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의 사도라 자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가 소속이라는 이런 말을 하면 상대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뭐 아무 것도 없는 놈이 헛소리한다고 무시할 것입니다. 그럼 기가 죽고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나는 없고 껍데기만 있고, 남만 있습니다. 그렇기에 늘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론 하나님께 내가 속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요. 그러니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말할 때, 사람들에게 내가 내 자신에게 속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으로 살고, 나 자신으로 당당하라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조상대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사람은 원래 타고난 정체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히브리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모세는 혈통적으로 히브리 사람입니다. 이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세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자기 동족을 돌아보고자 스스로 위험에 빠져드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원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 너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밝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동포인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애굽 사람으로, 애굽 사람들에게는 히브리 민족으로 여겨졌던 너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임을 밝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은 평범함 가운데 있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이란 것은 순종이 아니라 잡종일 때 생겨납니다. 모세가 자신을 볼 때, 순종이 아닌 것이지요. 애굽 왕가에서도 정치적으로 힘을 잃고 쫓겨난 것도 순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로 따지면 육두품이기에 신분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서자는 차별을 받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가지냐 하면, 우리는 잡종보다는 순종이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구별되는 것이라고 하지요. 구별된다는 것은 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희귀하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보면, 순종이라 여기는 것들은 열성일 경우가 많습니다. 열성 유전자를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잡종일수록 생존에 강한 우성 유전자일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이 좋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생존이 어렵기에 구별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게 좋다고 붙잡고 있는데,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거룩함은 평범한 것들 가운데 있습니다. 잡종일 수록 특색이 없이 평범합니다. 하나님은 잡종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모세가 경험함 거룩함을 보세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거룩의 개념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는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나는 제단이나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그 누추한 일상 그 한가운데에서 모세는 만났습니다. 자신이 익숙한 어느 산자락 어느 곳에서 가시덤불에 불이 타면서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처럼 익숙함에서 달리 보이는 한순간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바로 네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그 거룩한 곳에서 너는 신을 벗으라는 명령입니다. 바로 네가 서 있는 자리에 있는 너 자신에게 거룩함이 있다는 것이지요.

 

거룩의 세속화는 일상의 거룩화이다

이것을 거룩의 세속화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속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하지요. 세속화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성한 속성을 지닌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 신성한 속성을 잃고 범속한 세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속화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의 세속화라는 것은 긍정적 관점이 있습니다. 거룩한 신성이 이 땅으로 침투해 와서 자신을 드러내면, 그 신성한 속성을 잃을 위험은 있으나 반대로 그 사회가 거룩해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거룩의 세속화를 긍정적으로 나타낸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한 후 받은 율법 십계명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법으로 제도화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은 우리가 구별해서 드리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룩의 참 뜻은 하나님의 신성이 이 땅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만큼 거룩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거룩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참된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 모세가 경험한 거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강권적으로 침투하셔서 당신의 섭리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광야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모세에게 거룩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의 세속화는 다른 말로 일상의 거룩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 가는 하나님, 그냥 자신의 조상신으로만 여겨졌던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 감추어진 하나님을 구체화하여, 자신의 일상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모세는 경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침투는 숨겨져 있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며 정체성을 찾는 이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뜻을 묻고 그 섭리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침투를 받드는 참된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하니 너의 신발을 벗어라 했을 때, 모세는 신발을 바로 벗은 것입니다. 모세의 작은 순종, 그 신발을 벗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끝까지 지켜야 할 정체성

마지막으로 한 부분을 살펴봅시다.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출애굽 할 명분을 한가지 알려 주십니다. 바로에게 나아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나타나셨기에 광야로 사흘길 걸어가 제사드리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하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선택받은 제사장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질서로 다시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침투를 받드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목적이자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자인 바로가 모세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온갖 이적으로 이집트를 친 다음에야 너희를 내보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침투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이 땅에 대한 징벌이 분명히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성도도 함께 이 땅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싸우겠습니까? 세상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침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침투를 받드는 것이 이스라엘이 제사장 백성으로서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결국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집트 여인들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달라고 하여 너희 아들딸들을 치장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금붙이는 전쟁에 승리한 대가로 받은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침투로 인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으로 자식들을 꾸미라 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대대손손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의 내면화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참된 정체성을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룩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눈에 보이는 은붙이 금붙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당, 예배당이 거룩한 곳이라 생각하고, 뭐 기적이나 신비로운 사건이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외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에요. 우리 존재가 바로 거룩이에요. 이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우리 정체성이 흔들리게 됩니다. 따라서 거룩의 시작은 모세가 고민했듯이,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내면화해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내신 거룩을 온전히 드러낼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