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사기

사사기 19장 1절-30절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또 본 일도 없다

by 알렉스강 2024. 7. 5.

사사기 19장 1절-30절 새번역

 

1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한 레위 남자가 에브라임의 산골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

2 그러나 무슨 일로 화가 난 그 여자는, 그를 떠나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친정 집으로 돌아가서, 넉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3 그래서 그 남편은 그 여자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자기의 종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끌어내어 길을 떠났다. 그 여자가 그를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쁘게 맞이하였다.

4 그의 장인 곧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붙들므로, 그는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며 먹고 마시면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5 나흘째 되는 날, 그가 아침 일찍 깨어 떠나려고 일어서니,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사위에게 말하였다. "빵을 좀 더 먹고서 속이 든든해지거든 떠나게."

6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은 또 앉아서 함께 먹고 마셨다.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사위에게 말하였다. "부디 오늘 하룻밤 더 여기서 묵으면서 기분좋게 쉬게."

7 그 사람은 일어나 가려고 하였으나, 그의 장인이 권하여 다시 거기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8 닷새째 되는 날 아침에 그가 일찍 일어나 떠나려고 하니,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권하였다. "우선 속이 든든해지도록 무얼 좀 먹고 쉬었다가, 한낮을 피하여 천천히 떠나게." 그들 둘은 또 음식을 먹었다.

9 그 사람이 일어나 자기의 첩과 종을 데리고 떠나려고 하니, 그의 장인인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권하였다. "자,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어 가니, 하룻밤만 더 묵어 가게. 이제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머물면서 기분좋게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나, 자네의 집으로 가게."

10 그러나 그 사람은 하룻밤을 더 묵을 생각이 없어서, 일어나서 나귀 두 마리에 안장을 지우고, 첩과 함께 길을 떠나, 여부스의 맞은쪽에 이르렀다.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다.)

11 그들이 여부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벌써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의 종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이제 발길을 돌려 여부스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하룻밤 묵어서 가시지요."

12 그러나 그의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안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기브아까지 가야 한다."

13 그는 종에게 또 말하였다. "기브아나 라마, 두 곳 가운데 어느 한 곳에 가서 묵도록 하자."

14 그래서 그들이 그 곳을 지나 계속 나아갈 때에,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 가까이에서 해가 지고 말았다.

15 그들은 기브아에 들어가서 묵으려고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들어가 성읍 광장에 앉았으나,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 마침 그 때에 해가 저물어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본래 에브라임 산간지방 사람인데, 그 때에 그는 기브아에서 살고 있었다. (기브아의 주민은 베냐민 자손이다.)

17 그 노인이 성읍 광장에 나그네들이 있는 것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18 레위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서 길을 떠나, 내가 사는 에브라임 산골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이 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19 우리에게는 나귀에게 먹일 먹이도 있고, 또 나와 나의 처와 종이 함께 먹을 빵과 포도주도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20 노인이 말하였다. "잘 오셨소.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내가 잘 돌보아 드리리다. 광장에서 밤을 새워서는 안 되지요."

21 노인은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들은 발을 씻고 나서, 먹고 마셨다.

22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사내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23 그러자 주인 노인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24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25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에 동이 틀 때에야 놓아 주었다.

26 동이 트자,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이 있는 그 노인의 집으로 돌아와, 문에 쓰러져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27 그 여자의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집의 문을 열고 떠나려고 나와 보니, 자기 첩인 그 여자가 두 팔로 문지방을 잡고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28 일어나서 같이 가자고 말하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검을 나귀에 싣고, 길을 떠나 자기 고장으로 갔다.

29 집에 들어서자마자 칼을 가져다가, 첩의 주검을 열두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온 지역으로 그것을 보냈다.

30 그것을 보는 사람들마다 이구 동성으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또 본 일도 없다. 이 일을 깊이 생각하여 보고 의논한 다음에, 의견을 말하기로 하자."

 

 

에브라임 산골에 임시로 거주하던 레위인

오늘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끔찍한 사건 중 하나인 어느 한 레위인의 비극적 일화를 다룹니다. 이 사건은 사사기 21장까지 이어지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신앙을 지켜나가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소명을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할지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마지막 에피소드인 오늘 본문에서도 앞선 미가와 단 지파의 이야기처럼 특정 사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17장에서처럼 레위인이 등장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지난번에는 조연 역할이었다면, 이번에는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이 레위인은 이스라엘 북쪽 에브라임 산지의 구석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이 거주하던 곳과는 거리가 먼 이스라엘 남부 유다 출신의 첩을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영향력 있고 재산이 많은 경우 아내를 여럿 두거나 첩을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륜일 경우에는 율법에서 간음으로 여겨 죄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하물며 레위인의 경우 제사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기에 일반 사람들 보다 윤리적으로 엄격한 삶을 암묵적으로 요구받습니다. 여러 명의 아내나 첩을 둘 수 있는 경우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극소수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제공하는 생활비로 생계를 이어가는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는 것이 상식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레위인이 산지 구석인 산골에서 살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레위인이 산골에 살았다는 것은 당시 각 지파마다 레위인을 홀대하고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앞서 17장에서 미가의 집에 고용된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산지 구석에 살았다고 했을 때, 살다는 말이 개역개정에서 거류하다라고 번역되는 게르גָּר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이방인으로 타향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레위인은 지정된 성읍에 정착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인이 첩을 둘 만큼 부유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레위인이 가난해서 산골에 들어갔다기보다는, 어떤 목적으로 산골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추측하건데 이 레위인은 훨씬 더 좋은 수익을 보장받는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고자 에브라임 산골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산당 문화

이것은 사사시대에 들어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한 산당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당은 주로 높은 장소에 세워놓았던 이스라엘 또는 가나안의 야외 제단을 말합니다. 나무 밑이나 숲 속에 다가 산당을 세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가나안 토착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은 모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높은 장소에 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가나안의 산당들을 이용하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이 행태는 가나안 농경사회의 풍요신 숭배의식을 받아들이면서 야훼 하나님을 바알로 대체하는 혼합주의 종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드온 때에 유행한 혼합 종교인 언약의 바알이라 불리는 바알브올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앞선 17장에서도 미가가 은신상을 자기 집에 세워서 종교 장사를 한 것처럼, 당시 자기 집에 제단을 두거나 산당을 만들어 소위 비즈니스를 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은 산당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할 때, 여사제들을 동원해 매우 성적으로 부도덕한 예배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이후 이스라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산당문화를 없애라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모습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산당 중에서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산당처럼 여사제를 통해 매춘을 한 곳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이 레위인의 첩은 에브라임 산당의 여사제로서 제사를 도울뿐만 아니라 레위인과 비즈니스 관계로 매춘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첩의 갈등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그 첩이 레위인에게 화가 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화가 났다고 번역한 단어 자나זָנָה는 주로 성적으로 부정적인 행동에 대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역개정 번역으로는 이 구절을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9장 전체 흐름으로 보면 이 첩이 행음했다기보다는 화가 났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정서적인 문제인지, 경제적인 문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위인과 관계가 틀어졌음은 분명합니다. 결국 이 여인은 레위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별거 생활을 합니다. 시간이 넉 달이 지난 후, 레위인은 첩을 데려오려고 종과 나귀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레위인은 다정하게 여인의 마음을 풀어주었고, 다행히 원만하게 문제가 풀려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장인이 사위를 극진하게 대접하는데 너무 지나칩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딸이 남편과 화해해서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사위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으로 대접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3일 정도 환대했으면 충분했을 텐데, 나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떠나고자 했으나, 장인의 요청으로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 닷새째에도 장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간을 끌다가 결국 그날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여섯째 날 저녁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레위인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제사장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이라도 출발해야지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장인은 육체적인 쾌락, 즉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사위인 레위인을 즐겁게 해주고자 했습니다. 사위가 해야 할 제사장의 책임이나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보다 한 인간으로서 즐기는 육체적인 만족을 채워주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레위인도 그렇고 장인도 마찬가지로 매우 세속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접대를 하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접대에 사용되는 돈은 어차피 내 돈이 아니라 회사 돈이라 생각하고 흥청망청 쓰는 것입니다. 장인은 어떻게든 레위인을 육체적으로 즐겁게 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아님이 확실합니다.

 

위선적인 레위인의 모습

유다 베를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가는 여정에는 여러 도시를 거치게 됩니다. 레위인은 출발이 늦어서 얼마 가지 못해 해가 질 무렵, 베들레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부스 즉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여부스는 가나안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결국 유다의 땅이 됩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종에게 그곳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같은 동족인 사람들에게 신세 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가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라는 곳에 머물고자 했습니다.

 

여부스가 아니라 기브아로 간 것은 레위인인 자신이 이방인과 교제하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안식일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행하는데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레위인의 모습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제사장인데, 유독 어떤 한 형식적인 부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위선적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정한 율법 몇 가지에 집착하여 거룩을 따지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도 같은 것입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성읍에 이르러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넓은 길에 서 있으며 하루 밤 신세를 질 사람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나그네를 재워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낯선 사람인 자신을 나그네로 생각하며 호의를 베풀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실망스럽게도 아무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해가 지고 어두워진 때 길에 앉아있던 레위인 일행을 맞이한 이는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은 아니지만, 생계로 인해 타향인 베냐민 지파 땅에 거하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된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동향 사람이 타향에서 만나면 반갑다고 하지요. 레위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기브아에서의 비극

그런데 여기서 비극이 발생합니다. 마땅히 호의를 베풀어야 할 베냐민 사람들이 레위인에게 아무 몹쓸 일을 저지릅니다. 하룻밤 묵고 갈 집을 찾는다고 사람들 눈에 많이 띄는 길에 서 있었기에 자기 동네에 낯선 레위인이 왔다는 것이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이것을 기브아에 살던 불량배들의 눈과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몰려와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라고 요구했습니다. 동성애로  집단으로 강간하겠다고 자신의 집에 나그네로 유숙하는 레위인을 요구한 것입니다. 레위인으로서 이방인과 접촉을 피하고자 여부스에 머무르는 것도 피했는데, 최악의 능욕으로 여겨지는 동성애 윤간을 레위인은 같은 동족 사람들에게 요구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 두 천사를 롯에게 보냅니다. 소돔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고 롯의 집을 포위하고 롯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내어놓아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집단으로 성관계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난봉꾼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롯의 가족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사기에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든 이스라엘의 땅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징조와 같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첩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주다

노인은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처녀 딸이나 레위인의 첩을 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결국 레위인은 자기 첩을 집 밖으로 떠밀어 버립니다. 마치 맹수에게 먹이거리를 주듯이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불량배들은 미친 듯이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 동이 틀 때에 놓아주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레위인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안식일에 정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 대신에 자신의 첩을 내준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자신의 첩을 산당 여사제로 제사 지내러 온 사람들과 매춘하도록 내어주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준 것입니다.

 

아침에 레위인은 떠나려고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의 첩이 문지방에 손을 대고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위인은 첩을 내보낸 뒤 태연히 잠을 청한 듯합니다. 레위인은 첩을 보고서 무심하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명령조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었습니다. 밤새 죽을 만큼 처참하게 당한 뒤 문까지 와서 안으로 기어들어오다가 결국 숨을 거둔 것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어서 엽기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레위인은 여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칼로 시체를 찍어 열두 덩이로 토막 낸 다음 이스라엘 각 지파 대표에게 보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난리가 납니다. 출애굽 이후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또 본 일도 없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전역이 흥분하며 분노합니다.

 

공적 제도를 사사로운 일로 악용하다

레위인의 의도는 기브아의 패륜과 범죄를 온 이스라엘에게 공개하여 이를 처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 악한 일을 알고서도 처벌하는 조치에 동참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서 똑같이 쪼개어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통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와 같은 동물로 하지만,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희생 제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공적 제도를 개인의 원한을 풀고자 보복하기 위해서 사사로운 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고위공직자들이 국가적인 시스템을 사적으로 악용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여인을 윤간하여 죽인 사건 보다 레위인이 개인적 분풀이로 여인의 시체를 열 두 도막 낸 사건이 이스라엘을 흥분시킨 것입니다. 물론 기브아 사람들이 악행을 한 것은 맞지만, 레위인의 네로남불 하는 위선적인 태도가 더 문제입니다. 레위인은 철저히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싹 닦아 버립니다. 레위인이 첩을 삼는다던지, 위기 속에 비겁하게 자신의 여자를 내던진다던지, 아무리 원한이 쌓였더라도 나실인으로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할 레위인이 잔인하게 시체를 열두 토막 낸다든지 등등, 자기의 본문을 망각하고 잘못한 행실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습니다.

 

국가적 재난에는 레위인의 타락이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죄에 대한 무감각과 인간성 상실, 잔인함과 추악함의 극단을 한 번에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가장 추악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미 영적으로 둔감해진 이스라엘 사람들도 경학 하면서 대책을 논의하기로 한 정도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드러낸 타락의 정도가 과연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물을 만합니다.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의 타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의 타락이 당시 시대의 도덕적 무질서와 부패와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한 지파가 거의 멸절하다시피 하는 국가적인 비극에 중심에는 레위인의 타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서 사사기 17장의 미가의 집 은신상은 단 지파가 제도적으로 우상숭배토록 함으로 결국 이스라엘에서 단 지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 사건의 숨은 주인공으로 세속적 직업인처럼 그저 부와 명성을 쫓아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유다 지파 출신의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사건 역시 이후 20장을 살펴보면, 베냐민 지파는 점멸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두 사건에 나오는 레위인의 공통점은 오직 돈을 밝히고 여자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는 쾌락에 집중한 점입니다. 제사장을 세속적인 직업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소명 없이 살아간 것입니다. 레위인을 오늘날 목사나 선교사만으로 국한 지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인제사장설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들은 마땅히 각자의 자리에서 레위인과 같은 소명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부와 명성만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면, 결국 이 사회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에 삼켜져 어둠에 잠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