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장 1절-11절 새번역
1 그리하여 북쪽의 단에서부터 남쪽의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또 동쪽의 길르앗 땅에서도,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쏟아져 나와서, 온 회중이 한꺼번에 미스바에서 주님 앞에 모였다.
2 이 때에 온 백성 곧 이스라엘 온 지파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에 참석하였다. 칼을 찬 보병도 사십만 명이나 모였다.
3 베냐민 자손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레위 사람에게 물었다.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하여 보시오."
4 그러자 죽은 여자의 남편인 그 레위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는 첩을 데리고 베냐민 사람의 땅에 있는 기브아로 간 적이 있습니다. 하룻밤을 묵을 셈이었습니다.
5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6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7 여러분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십니까? 이제 여러분의 생각과 대책을 내놓으십시오!"
8 그러자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외쳤다. "우리 가운데서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가서는 안 된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9 이제 기브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일은 이렇다. 제비를 뽑아 그들을 치자.
10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백 명마다 열 명을, 천 명마다 백 명을, 만 명마다 천 명을 뽑아서, 그들에게 군인들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게 하고, 군인들은 베냐민 땅에 있는 기브아로 가서, 기브아 사람이 이스라엘 안에서 저지른 이 모든 수치스러운 일을 벌하게 하자."
11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같이 뭉쳐서,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다.
사사시대 처음으로 열린 미스바 총회
사사기 20장은 이스라엘 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사사기 19장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한 레위인이 첩과 함께 기브아에 도착하여 에브라임 출신의 고향 노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의 불량배들이 쳐들어와 레위인을 동성 집단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이에 레위인은 자신 대신 첩을 내어주었고, 첩은 밤새 윤간을 당한 후 죽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첩이 죽은 것을 발견한 레위인은 그녀의 시신을 열두 도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보냈습니다. 이로 인해 온 이스라엘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하나님 영보다 육체의 감정에 반응하는 죄인 이스라엘
이 사건으로 가나안 땅에 흩어져 살던 모든 지파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사사시대 들어 처음으로 총회가 열리고 모든 지파가 모인 것입니다. 그 자체로 바람직한 사건일 수 있지만, 여인의 죽음이 그렇게 큰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모든 지파가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며, 그 숫자도 40만 명에 달했습니다. 암몬이나 블레셋과 싸울 때도 그렇게 모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드온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미디안과 싸울 자를 모을 때에도 3만 명만 모였었습니다. 레위인의 행동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모인 듯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3만 명이 모였는데, 인위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흥분하니 40만 명이 모인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베냐민에게 대처하는 모습도 성급하고 섣부릅니다. 내부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대응은 비정상적입니다. 자기 집안에서 일어난 일에는 강경하게 징벌을 하면서, 외부의 일에는 무관심한 모습입니다. 막내 지파인 베냐민을 혼내기 위해 다 같이 모인 것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나안 전쟁이나 이방인과의 전쟁에는 숨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인의 잘못을 정죄하는 일에는 벌떼처럼 모였습니다. 교회에서도 밖으로 나가 전도하자고 하면 잘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싸우기 위해 안 나오던 새벽예배에도 나와서 열심을 냅니다. 적과의 싸움에는 하나 되지 못하면서 형제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다투기 위해서는 하나가 됩니다.
비합리적이고 성경적이지도 못한 미스바 총회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 모여 레위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나는 첩을 데리고 베냐민 사람의 땅에 있는 기브아로 간 적이 있습니다. 하룻밤을 묵을 셈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이 첩을 데리고 기브아로 갔고, 그곳에서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으며, 자신은 살았지만 첩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증언을 19장의 내용과 대조해 보면, 레위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용을 디테일하게 따지면 진실은 아닙니다. 레위인은 자신이 첩을 내어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것입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자신은 피하고 책임지지 않은 레위인에게도 분명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의 진행도 문제가 많습니다. 재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증인을 세워야 합니다.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한 사람의 진술이 진실이 되려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기브아의 사건을 보자면, 무엇보다 레위인이 하루 묵고 간 집주인인 노인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기브아 사람 중 목격자가 있다면 나와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레위인의 진술만 있을 뿐입니다. 반대 증인도 없이 무작정 레위인의 말만 믿어 버립니다. 사람은 단면만 보게 됩니다. 자기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특히 레위인의 경우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진술한 것입니다.
내로남불의 전형 레위인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 지적은 잘해도, 남의 눈의 티끌은 봐도 나의 눈의 들보는 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입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레위인입니다. 우선 첩을 둔 것도 문제이며, 불량배들이 찾아왔을 때 비겁하게 첩을 내몰고, 이후의 첩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일어난 일과 상관없듯이 태연하게 아침에 동이 트자마자 떠나려는 모습은 너무나 냉혹할 정도로 이기적입니다. 만약 첩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녀가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서둘러 응급조치를 했다면 생명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떼고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레위인이 왜 이렇게 문제를 키웠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첩이 죽은 것을 보고 돌아왔을 텐데, 시신을 열두 조각내어 지파별로 보낸 것은 의도적으로 전국적인 공분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대의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레위인다운 생각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인 자신이 보기에 이스라엘에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 그 썩은 부분을 도려내어 대책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회복하자는 대의를 내세웠지만, 그 감추어진 목적이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함입니다. 결국 레위인은 사사로운 원한의 감정을 풀고자 이스라엘의 공적 시스템을 이용해서 것입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이스라엘
그런데 놀랍게도 레위인의 호소가 이스라엘 전체에 먹혀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이것을 총회를 통해서 열두 지파 전체가 합의하고 진행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전쟁을 치를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전쟁을 어떻게 치를지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모인 40만의 병력 중 십 분의 일의 인원을 결정하여 양식을 준비할 지에 대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전쟁은 이미 결정해 놓고 나서 어떻게 치를 것인지만 물은 것입니다. 마치 사춘기 어린 남자아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리고 그 여자도 나를 좋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주권자가 아니라 단지 보조자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의 실패를 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음행과 망령됨을 폭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레위인이 그 여자의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서 각 지파로 보내는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이 레위인의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의 음행과 망령됨을 폭로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레위인이 자기 본심을 숨기고 원한을 값고자 만든 가자 명분이지만, 놀랍게도 이 말은 이스라엘의 정확한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총회로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재끼고 본인이 선악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다 결정해 놓고 하나님은 자기들 하는 것이나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실체가 폭로되자 희생양을 찾다
레위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제물을 잡아 그 각을 떠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들입니다. 토막 내는 것에 전문가입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그렇게 각을 떠서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 첩이 바로 영적으로 완전히 갈기갈기 찌저진 이스라엘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실체가 폭로되자,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바로 그 희생양이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베냐민 지파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서 나머지 열한 지파가 빠짐없이, 무려 40만 명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 각오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였다면, 가나안의 모든 땅은 벌써 이스라엘의 차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앞서 사사기 19장 30절을 보면, 그 각이 뜨인 제물을 보자마자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한 목소리로 "이런 악한 일은 행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다"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의 선악 구조를 보여줍니다. '나는 이런 일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한 지파 모두가 그렇게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해 이것이 너희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제물을 잘라서 각 지파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각 지파는 선악을 심판하는 심판자로 나섭니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는 자로 서게 된 죽은 아담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너희 몸을 드려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교회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한 산제사로 너희 몸을 드리라"고요. 여기서 제사라는 단어는 '제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레위인이 그 신부를 각을 떠서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부르신 것은 본인이 열두 토막으로 쪼개신 것처럼 우리도 산 제물로 열두 토막으로 쪼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의 신부가 제물이 되어 열두 개로 쪼개어져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우리도 쪼개어져서 진정한 우리의 영적 실체가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열두 토막으로 쪼개는 그 순간, 결국 폭로되는 것은 세상의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영적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실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도, 아니 그 어떤 것도 끝까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잘못이 있다면, 잘못한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잘못이 있으면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희생양을 찾기 때문에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서게 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두려워서 나 자신을 가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자리에 내가 서서 선악을 판단하는 잘못을 계속 범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미스바 총회에서 모여한 일이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판단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치를지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동족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자신들의 위선적인 추악한 실체가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일 희생양을 찾고자 가장 약한 자를 찾아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추악하고 위선적인 근본적인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악한 방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저주와 죽음의 길입니다. 열두 조각나는 깨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찢어지고 깨어지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고, 그리고 거짓된 세상의 악이 심판받는 길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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