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4장 1절-9절 새번역
1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가, 딤나에 있는 어떤 블레셋 처녀를 보았다.
2 그가 돌아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였다. "내가 딤나에 내려갔다가, 블레셋 처녀를 하나 보았습니다. 장가들고 싶습니다. 주선해 주십시오."
3 그러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타일렀다. "네 친척이나 네 백성의 딸들 가운데는 여자가 없느냐? 왜 너는 할례도 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을 아내로 맞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삼손은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꼭 그 여자를 색시로 데려와 주십시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4 그의 부모는,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
5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딤나에 있는 어떤 포도원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사자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6 그 때에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쳤으므로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7 그는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손은 그 여자를 무척 좋아하였다.
8 얼마 뒤에 삼손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으러 그 곳으로 다시 가다가, 길을 벗어나 자기가 죽인 사자가 있는 데로 가 보았더니, 그 죽은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다.
9 그는 손으로 꿀을 좀 떠다가 걸어가면서 먹고, 부모에게도 가져다 주었으나, 그 꿀이 사자의 주검에서 떠온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매우 사적인 사사 삼손
삼손의 출생에 이어서 본격적인 삼손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삼손이 장성해서 사사로 보여준 공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민족의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매우 사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연애와 결혼입니다. 삼손이 나서 자라난 도시는 마하네단이라는 불리는 곳으로 단 지파의 본거지입니다. 이곳은 블레셋 사람의 거주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습니다. 국경 부근에 위치했기에 당시 단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과 왕래가 잦았습니다. 불과 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딤나라는 블레셋 마을이 있었는데, 삼손은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삼손이 이 여인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눈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블레셋이 그리스 계통이라서 소위 말하는 서구인의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집트 왕비이자 여왕이지만, 당시 왕가는 그리스계였기에, 로마의 영웅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색적인 외모로 인해서인지 모르지만 삼손은 정말 인간적으로 이 여인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것에 환장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작정 하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삼손은 사사로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여자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는 하나님의 영을 내리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로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거룩하거나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삼손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의 문제
요즘도 그렇겠지만, 당시 풍습은 결혼하기 위해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양가의 부모가 먼저 만나서 신부의 몸값을 정한 다음, 신랑 측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신부를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삼손은 부모에게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겠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친족이나 동포 중에서 여자를 고르지 왜 하필 이방 여인을 아내를 맞이하려 하냐고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밝힙니다.
여기서 삼손의 부모가 거절한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부모는 삼손이 특별한 아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차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이기에,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사사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한 것입니다. 가장 상식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물론 삼손의 부모가 철저하게 사명을 지키는 자였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삼손의 부모가 사명에 투철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들의 결혼을 거절했다면, 일관되게 끝까지 결혼을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못마땅해하지만, 결국에는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이것은 나실인 사명에 헌신되고 투철한 부모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반대했을까요? 사사라든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한 특수한 이유 외에도 통상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흔들렸다고 하나, 여전히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문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단일민족을 중시 여기는 보수적인 우리 문화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이방인들과의 결혼은 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도 가나안 족속이나 이방 민족과의 결혼은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혼은 재산상의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땅을 중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으로 인해서 혹시 자기 땅이 이방 민족에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삼손의 부모도 보수적인 관점에서 외국인 며느리를 맞이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절대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금한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처음에 겐족속 이방인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고, 이후에도 이방인인 구스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롯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방인과 결혼 이후에 그 아내나 남편이 이스라엘 공동체 일원으로 들어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그들의 문화나 우상을 따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방인의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3절에서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내 눈에 좋기에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처음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7절에 삼손이 이 여인을 무척 좋아하였다 말하는데, 같은 이야기이다. 사실 이 말은 당시 사사기 시대를 관통하던 시대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사기의 결말을 담은 구절이 사사기 21장 25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자기 뜻에 맞는 대로 했다는 것이 바로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죄악과 탐욕으로 빠져들게 하는 타락의 신호와 같습니다. 요한 1서 2장 16절에서 말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한눈에 가버리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자기를 객관화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려듭니다. 밤에 불을 피웠을 때 주변에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습니다. 눈이 멀어 본능이 끌리는 곳으로 따라가지만, 결국 어리석게 자신을 태워버립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입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 역시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세상이 보기에 좋은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는 삶은 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땅의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고통받다가 죽어가게 됩니다.
사사로 지켜야 할 모든 규례를 어기다
결국 부모는 삼손의 뜻을 꺽지 못하고 삼손을 따라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아마도 부모가 먼저 가서 블레셋 여인의 부모와 상견례하면서 신부의 몸값을 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와 떨어져 뒤쫓아가서 딤나의 어느 한 포도원을 지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어린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하여서 사자를 손으로 찢어 죽여 버립니다. 여호와의 영이 참 놀랍다.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면 뭐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잘 사용되어야 하는데, 매우 사적으로 포도원에 있을 때, 블레셋 사람이 아니라 사자를 죽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엉뚱한 일 하라고 하나님의 영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행동은 일차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하실 구원을 예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당연히 자신이 하는 일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삼손이 포도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포도의 소출을 결코 먹어서는 안 됩니다. 포도원 주변에 어슬렁 거리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이지요. 이방 여인과의 결혼도 문제이지만, 삼손이 일상에서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삼손은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면 어마무시한 일이라 당연히 말해야 할 것인데, 삼손은 말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에 간 것도 걸리는 일이고, 자신에게 특별하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던 경험을 부모와 나누지 않았습니다. 대신 삼손은 블레셋 여인에게는 이 일을 이야기를 나눕니다. 부모와는 말을 통하지 않고 블레셋 여인과는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다
이것을 보고 삼손이 가정교육이 부족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적인 대화도 그렇고 일상의 대화가 단절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삼손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던지, 대화가 단절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자기주장대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부모를 존중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물론 삼손의 부모가 삼손을 잘 키운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사사이자 나실인인 사무엘처럼 바르게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삼손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행했고, 그리고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부분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율법적인 교훈을 도출할 수 있으나, 좀 더 넓게 본다면 사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는 계획의 일부입니다. 의도적으로 이 경험을 블레셋 여인에게 알려주도록 한 것입니다.
이후에 삼손은 다시 마하네단으로 돌아가던 길에 자신이 죽인 사자의 시체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자의 시체에 벌집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매우 건조한 지역이기에 사체가 쉽게 부패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삼손이 찢어 죽인 사자의 시체가 말라서 돌처럼 굳어져서 그곳에 벌들이 와서 벌집을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삼손도 이를 신기하게 여겨 꿀을 맛보고 그것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그 꿀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먹은 뒤, 몇 개를 따서 아담에게 가져다주고 먹게 한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여기서도 삼손은 또다시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를 어깁니다. 구약에서 사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도 사체를 꺼리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구별된 행동을 해야 할 나실인은 절대 부정한 것을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부모가 죽어도 그 시체를 손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앞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포도원에 들어가고, 부정한 사체에 손을 대는 것까지 삼손은 모든 나실인의 규례를 무시한 것입니다. 한 사건에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났다기에는 우연치고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행동이 이어집니다. 물론 삼손의 잘못과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4절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이 교훈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복음의 진리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율법적인 교훈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복음의 진리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율법적인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삼손이 사사의 규례를 어긴 것은 본인이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꿀을 보고 좋아했습니다. 꿀 앞에서 맥을 못 춥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유익만 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꿀은 딤나의 이방 여인이기도 합니다. 삼손은 자기 눈에 좋기 때문에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에게 당장 유익하기에, 자기에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유로 가리지 않고 손을 뻗치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내 쾌락을 위해서는 양심이고 뭐고 없고, 체면이고 미덕이고 무조건 달려드는 행동입니다. 내 눈에 좋은 대로, 내 마음에 좋은 대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내키는 대로 사니까 결국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삶의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삼손도 그렇고 이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삶이 꼬이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하게 어기거나 적당하게 지키면 조금씩 혼내면서 바꾸고 고치면 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고 삼손도 그렇고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모든 규례를 어겼습니다. 그러니 삼손은 개선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얻는 안식보다 대적 블레셋에게 눈치 보면서 적당히 빌붙어 타협하여 얻는 안식을 더 원했습니다. 40년이나 블레셋에 압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지와 상관없이 블레셋에게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은 삼손의 뜻이나 행동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와 계획입니다. 삼손의 뜻과 욕망, 그 행동은 결국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뜻과 어긋나는 행동을 할지라도,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질러도 결국에는 돌고 돌아서 하나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삼손도 이용하시고, 삼손의 부모도 사용하시고, 심지어 대적 블레셋 조차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 합리화하는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삼손의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자신이 삼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나 나실인으로 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경솔함과 실수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것은 분명 맞습니다. 우리의 선과 악 모든 것을 다 이용하셔서 결국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손의 경우처럼 자기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죽도록 고생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덕을 끼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교훈에 뜻을 둘 때,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을 놓치고 삼손의 예외적인 상황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결국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은 너무나 악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함과 자신의 죄에 대해서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우리 인간의 본성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을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무책임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삼손의 교훈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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