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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 5장 24절-31절 욕심으로 왜곡된 모성애의 파국

by 알렉스강 2024. 6. 6.

사사기 5장 24절-31절 새번역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어느 여인보다 더 복을 받을 것이다. 장막에 사는 어떤 여인보다도 더 복을 받을 것이다.

25 시스라가 물을 달라고 할 때에 야엘은 우유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다.

26 왼손에는 장막 말뚝을 쥐고, 오른손에는 대장장이의 망치를 쥐고,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깨부수고, 관자놀이를 꿰뚫어 버렸다.

27 시스라는 그의 발 앞에 고꾸라져서 쓰러진 채 누웠다. 그의 발 앞에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고꾸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고 말았다.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으로 내다보며, 창살 틈으로 내다보며 울부짖었다. "그의 병거가 왜 이렇게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가 왜 이처럼 늦게 오는가?"

29 그의 시녀들 가운데서 가장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시스라의 어머니도 그 말을 따라 이렇게 혼잣말로 말하였을 것이다.

30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

31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이처럼 모두 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뒤로 그 땅에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야엘과 시스라, Artemisia Gentileschi, 1620, oil on canvas 86*125

 

특별한 존재인 어머니

군대를 가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애인일 수 있으나, 그보다 더 그리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힘든 훈련 뒤 어머니를 부르라 말하면, 그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다 보면 나를 위해 가장 희생적이었고, 끝까지 염려해 주시는 분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어머니입니다. 시스라는 그리 주목할 만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나왔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시스라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시스라의 어머니와 야엘

사사기 5장 드보라의 노래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문학적으로 대조의 기법을 잘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대비되는 두 단어는 저주하라와 복을 받다 입니다. 앞선 말씀에서 메로스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인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며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을 받은 야엘과 대비하여 저주받는 메로스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경우로 시스라의 어머니를 언급한 것입니다.

 

야엘은 집을 떠나 장막에서 평범하게 생활을 했다면, 시스라의 어머니는 창문이 있는 대저택에 거하면서 시녀에게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되었다면 중년의 나이이기에,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는 어느 정도 지긋한 나이를 먹은 듯합니다. 반대로 말뚝을 내리쳐서 단번에 머리를 깨부수고 관자놀이를 꿰뚫어 버리는 완력을 지닌 야엘은 젊은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여인이 너무나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데 한 여인은 복을 받고, 한 여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지요. 

 

시스라의 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시스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당황스럽고 안쓰럽게 느낍니다. 2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으로 내다보며, 창살 틈으로 내다보며 울부짖었다. 그의 병거가 왜 이렇게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가 왜 이처럼 늦게 오는가?” 영문을 모른 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무리 원수의 군대장관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시스라의 어머니의 초조함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고 감정이입을 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시스라를 죽인 야엘이 야속하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금세 기우였음을 알게 됩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혜로운 시녀들이 등장하여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서 이 여인들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

 

잘못된 모성애

채색옷을 챙겼냐고 묻는 여인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착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인들이 지혜롭다 하나 사실 지혜롭지 못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스라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승전으로 노략해 올 전리품에 대한 기대가 먼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들은 후자가 먼저인 것입니다. 30절에서 노략이라는 표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3번 나오나, 실제로는 4번이나 반복해서 쓰입니다. 노략으로 시작해서 노략으로 끝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뭐하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노략질하고자 전쟁에 나선 거임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민족을 공격해서 괴롭히는 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 역시 시스라와 같은 공범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스라의 모성애는 악한 자들이 악한 일 하고서 그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스라가 보인 탐욕을 그 어머니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시스라로 인해서 받은 고통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도덕적 감수성을 가졌다면, 아들의 범죄에 대해서 개탄하며 어떻게든 막고자 했을 것입니다.

 

처녀와 채색옷

노략물에 대해서도 언급을 합니다. 노략물은 첫 번째 처녀이고, 두 번째는 채색옷입니다. 먼저 처녀는 히브리어로 라함רַחַם으로 원래 여자의 음부를 말합니다. 노골적으로 성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시스라가 이스라엘의 젊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성적으로 착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자신의 입으로 거론하는 것으로 보면, 그녀 역시 마치 포주처럼 아들과 동조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처녀들을 성적 노리개로 데려다가 몸을 팔게 하고 그로 인해 큰 수익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엘이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은 행동은 매우 정당해 보입니다. 사실 시스라는 야엘을 성적 대상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창녀들은 길 가는 나그네를 대상으로 장막에서 노숙하며 손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4장 18절을 보시면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에 들어오자 야엘이 그를 이불로 덮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성적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야엘은 창녀로 위장하여 시스라를 처단한 것입니다. 수많은 여인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노략했던 시스라에게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노략물인 채색옷은 히브리어로 체바צֶבַע입니다. 채색 옷은 염색을 하거나 색실로 수놓은 옷은 값비싼 옷들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채색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염료로 염색한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옷을 채색옷이라 한 것입니다. 적군의 목을 내리쳐 흘린 피 묻은 옷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가져온 옷이 많을수록 큰 승리를 거둔 것이지요. 그래서 지혜롭다 여겨지는 여인들은 시스라가 죽은 시신으로부터 이 옷을 벗겨 가져오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라 말합니다. 내 아들은 무조건 이길 것이라 생각하며, 사건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합니까? 아들에 대한 애틋한 모성애가 아닙니다. 내 아들과 가족의 이익만 생각하는 모성애로 위장한 자기 욕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와 가나안의 어머니

시스라의 어머니는 야엘과 대조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드보라와도 대조가 됩니다. 본문의 앞선 구절인 5장 7절을 보시면,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드보라는 앞서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 문제를 두고 12지파를 객관적을 바라봅니다. 모든 지파가 자기 자식과도 같을 것인데, 편애를 한다거나 일방적으로 칭찬만 하지 않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분명하게 틀렸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가나안의 어머니인 시스라의 어머니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믿음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기준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국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기손 강에서 있었던 여호와의 전쟁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이처럼 모두 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뒤로 그 땅에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결국 핵심은 야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적은 다 망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같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야훼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하나님은 눈동자와 같이 돌보시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실천할 것인가

결국 시스라와 그 어머니는 모두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의 권리나 자존심은 비참하게 유린되어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기 이권만 도모하는 자들은 처음에는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는 듯 하나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실천하는 자들은 인생사에 어려움이 닥쳐도 결국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떠나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드보라와 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열 두 지파들은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관망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선택지가 우리에게도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먹고살기 위한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에 하나님을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시각을 중심에 놓은 것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전형적으로 세속에 물든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시스라의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이방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 소금이 맛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31절에 드보라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드보라의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늘에 해와 별처럼 그 빛을 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