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장 17절-24절 새번역
17 기드온이 또 주님께 아뢰었다. "참으로 나를 좋게 보아 주신다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18 내가 예물을 꺼내와서 가져다 놓겠으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떠나지 마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
19 기드온은 즉시 가서, 염소 새끼 한 마리로 요리를 만들고, 밀가루 한 에바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도 만들고, 고기는 바구니에 담고, 국물은 그릇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지고 가서 천사에게 주었다.
20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빵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였더니,
21 주님의 천사가 손에 든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빵에 댔다. 그러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빵을 살라 버렸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천사는 그 앞에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22 기드온은 그가 주님의 천사라는 것을 알고, 떨면서 말하였다. "주 하나님, 내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여 뵈었습니다."
23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
24 기드온은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그 제단은 오늘날까지도 아비에셀 사람의 땅인 오브라에 서 있다.)
하나님의 다섯 가지 이름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한 다섯 가지의 유명한 호칭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 이레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 이삭을 대신하여 예비하신 양으로 번제 드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산에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고 고백하며, 모리아 산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습니다. 두번째는 여호와 라파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쓴 물을 먹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큰 병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치유하시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 중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라 부르셨습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 닛시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멕렉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모세가 단을 쌓고 하나님을 높이며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이라높여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에스겔서 48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선지자 에스겔은 환상 중 하늘의 있는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여호와 삼마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으나, 이제 새로운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영원히 거함을 본 것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신다 하며 여호와 삼마라 부른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 샬롬입니다. 샬롬은 평안하고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만날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도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샬롬은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샬롬은 단순한 인사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인사는 안녕하길 바라는 희망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샬롬은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시고, 평안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먼저 앞선 내용을 다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해서 미디안을 통해서 벌을 주신 것입니다. 미디안은 주로 가을 추수 때 쳐들어왔습니다. 농사를 한 해 잘 지어 놓으면, 그걸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메뚜기 떼처럼 낙타를 타고 와서 쓸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게 사람을 허탈하게 만듭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모든 것을 털고 가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평지에 있던 자신의 집을 떠나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렵게 차지한 가나안 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상실과 괴로움을 겪는 것은 미디안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입니다. 고난과 역경으로 시달린 삶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백성이 약속에 충실하지 못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한 해 두 해, 몇 해 동안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나자 이제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생명이 위급하니, 이제야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시나 바로 응답하시고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바로 기드온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를 주로 천사일 경우가 많습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때로는 천사를 하나님과 동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을 하나님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을 하나님이 나타난 것과 같다고 여긴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와 대화를 하다가,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확인하자, 바로 하나님으로 알고 엎드립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기드온은 뭔가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순수히 듣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강한 용사라 부르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함께 한다는 말씀에는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털고 있었는데, 이 곤란한 상황에 찾아와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냥 모르는 체하고 얼른 떠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말을 하니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원망과 분노
기드온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곡식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하며 염려하며 밀을 타작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더 불안하게 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참지 못하고 마음속에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고 원망하고 분노를 쏟아냅니다. 이 땅의 원수로 인해서 평온하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원망스러웠던 그 마음을 그대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기드온의 기질과는 너무 다른 행동입니다. 기드온은 소심하고 자기의 마음을 잘 안 드러 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자 자기 속 이야기를 거침없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원래 자신과 사뭇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식이 없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을 속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꿍하게 있다면, 계속해서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뭐가 문제인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를 말해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서 이방 민족에게 학대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도 가만히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고통과 아픔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념이 아니다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반항하며 투정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하신 바를 진행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너는 가서 그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힘이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불만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제 앞에 원망 그만하고 너의 동포를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하는 일을 네가 나가서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샬롬을 선포하는 영적인 여호와의 전쟁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행동, 작은 헌신 하나하나가 모여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려면, 내가 움직여야 합니다. 가서 봐야지 되지 내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표적을 구한 기드온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네가 가라 말씀하셨지만, 기드온은 순순히 따르지 않습니다. 사명받기를 꺼려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으로 격려를 했지만, 기드온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 권하면, 어지간하면 처음에는 빼다가 결국 넘어가주는 것이 좋은데, 기드온은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조건을 내겁니다. 증표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기드온 생각에는 마음에 분이 덜 풀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뭔가 먹으면서 다시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자 음식을 준비하고자 집에 다녀오고자 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분이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예물을 갖고 올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염소 새끼로 국을 만들고, 밀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자에게 가져갔습니다. 기드온이 음식을 가져오자, 하나님의 사자는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지팡이 끝으로 음식을 대자 불이 나와서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습니다. 기드온은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부었고,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대자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물을 받으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서 여호와의 사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인 예배
이게 기드온이 뜻한 바와 달리 제사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준비한 식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된 것입니다. 그제야 기드온은 이 천사가 하나님이 보낸 사자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그냥 환영이나 꿈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집에 가서 음식을 가져다가 먹으면서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믿음의 발걸음을 시작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기적을 구하고 표적을 구합니다. 물론 기적으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배가 가장 큰 표적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올린 제사, 예배야 말로 기드온이 경험한 강력한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본 순간,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두려워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기드온은 그가 주님의 천사라는 것을 알고, 떨면서 말하였다. "주 하나님, 내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여 뵈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약에서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 미명 동틀 무렵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기은 곳에다 그물을 던져라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많은 수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다 그 앞에 꼬꾸라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뵙게 되면, 다 하나같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죄나 부끄러움, 그리고 모든 약점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너는 죽지 않는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자는 떠나갔지만, 기드온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두려운 것은 망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죽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다 돈이 없으면 죽는 거 아닌가, 이러다 병들어 죽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무나 나약한 마음이지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원망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 집에 간 적이 있지요. 엘리야는 시장했는지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와 비교할 수 없이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사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 하나 구워서 아들과 나눠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남은 것마저 자신에게 달라고 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빵을 구워 엘리야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통에 밀가루가 다시 채워지고, 기름병에 기름이 다득 찼습니다. 3년 6개월의 가뭄의 기간 동안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샬롬
기드온은 나를 지켜주시고 안전케 하시는 분임을 그 심령 중심에서 믿기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에 대한 기드온의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기드온이 경험한 샬롬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영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내 앞에 나타나셨다면, 죄인인 나를 죽여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아니라 평화의 관계로 가게 하셨습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두 번째는 정신의 평화가 있습니다. 미디안의 약탈로 불안하며 숨어서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하던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큰 용사라 부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에도 분노하며 원망했던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런 기드온의 마음에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않는다는 그 말에 모든 불만과 원망이 사라졌습니다. 기드온의 마음에 찾아온 평안이 바로 샬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육적인 평화입니다. 실제로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외적인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직 육적인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은 승리하셨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임하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임마누엘 하나님의 현존이 바로 영의 샬롬, 정신의 샬롬, 육의 샬롬으로 구체적인 변화로 나타납니다. 나의 영혼과 육신, 그리고 삶이 변하여 샬롬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변화이기에, 세상이 알 수도,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화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입니다. 사람이 평강을 바라고 기원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샬롬을 선포하시면 반드시 평강이 실현됩니다. 기드온이 제단을 쌓으며 불렀던 여호와 살롬의 능력과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염려, 고통, 두려움을 몰아내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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