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5장 12절-23절 새번역
12 일어나라, 일어나라, 드보라야. 일어나라,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라. 일어나라, 바락아. 포로들을 끌고 가거라, 아비노암의 아들아.
13 그 때에 살아 남은 이들이 백성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내려왔고,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려고 용사들 가운데 내려오셨다.
14 에브라임에게서는 아말렉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내려오고, 베냐민의 뒤를 이어서는 너의 백성이 내려오고, 마길에서는 지휘관들이 내려오고 스불론에서는 지휘봉 잡은 이들이 내려왔다.
15 잇사갈의 지도자들이 드보라와 합세하고, 잇사갈과 바락도 이에 합세하여,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갔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 가운데서는 마음에 큰 반성이 있었다.
16 어찌하여 네가 양의 우리에 앉아, 양 떼를 부르는 피리 소리나 듣고 있는가? 르우벤 지파에서는 마음에 큰 반성을 하였다.
17 어찌하여 길르앗은 요단 강 건너에 자리잡고 있고, 어찌하여 단은 배 안에 머물러 있는가? 어찌하여 아셀은 바닷가에 앉아 있는가? 또 그 부둣가에서 편히 쉬고 있는가?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판 언덕 위에서 그렇게 싸운 백성이다.
19 여러 왕들이 와서 싸움을 돋우었다.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의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그들은 탈취물이나 은을 가져 가지 못하였다.
20 별들이 하늘에서 시스라와 싸웠고, 그 다니는 길에서 그와 싸웠다.
21 기손 강물이 그들을 휩쓸어 갔고, 옛 강 기손의 물결이 그들을 휩쓸어 갔다. 나의 영혼아! 너는 힘차게 진군하여라.
22 그 때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군마가 달리는 소리, 그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23 "메로스를 저주하여라." 주님의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을 저주하고 저주하여라! 그들은 주님을 도우러 나오지 않았다. 주님을 돕지 않았다. 적의 용사들과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파 연합체로 두신 이유
가나안은 여러 개의 족속으로 구성된 연합 국가입니다. 크게는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져 동맹체를 결성했습니다. 북부 가나안의 여러 족속이 하솔 왕 야빈을 중심으로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군의 총지휘관이 바로 시스라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자신의 영토와 지도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나안 입성 초기부터 동맹체로 느슨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을 두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군대도 재물도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12지파가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만을 가지며, 필요시 서로 연합하여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위급한 상황에서 힘을 합치면서 극복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도 한 지파의 힘으로는 완전하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서 도와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먹고살기 바쁜지 자기 자신만 돌본 것입니다. 결국에는 강한 이방 민족이 쳐들어왔을 때, 함께 힘을 모으지 못하고 각자 개별전투로 나가서 결국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결국 자신들이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에게 역으로 당한 것입니다. 가나안 하솔의 왕 야빈이 북부 가나안 족속을 연합시켜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압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그 밑에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었든 납달리와 스블론이 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지파들이 고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길로 다니지 못하고 작은 길로 숨어 다녔다고 하지요. 마음껏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나안 족속에게 빼앗기는 일이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라
가나안 족속으로 인한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극한에 이르자, 결국 여자 사사인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힘을 모으게 한 것입니다. 드보라의 뜻이 꿀벌입니다. 꿀벌이나 개미와 같은 군집 곤충은 혼자서는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함께 협력하여 힘을 모을 때 강해집니다. 드보라는 꿀벌처럼 함께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12절에서 드보라는 일어나라라고 무려 5번 이야기합니다. 함께 힘을 합치자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여호와의 전쟁, 이 영적인 싸움에 모두 함께 나아오길 독려한 것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을 시켜 군대를 모았을 때, 이스라엘 전체에서 군사 일만 명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바락이 속한 납달리 지파를 중심으로 옆에 있던 스블론 지파와 다른 여러 지파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의 군사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앞선 8절의 말씀을 보시면, 전쟁이 들이닥쳤는데 사만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 중 사분의 일만이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병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협력한 지파도 있고 그저 관망하고 지켜본 지파도 있었습니다. 모든 지파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드보라가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여한 지파
우선 가장 강성한 에브라임 지파가 참여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중에 아말렉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말렉은 에브라임 산지의 어느 골짜기 지명이라 보는 의견도 있고, 이방 민족이었던 아말렉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복속되어 살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른 견해가 아닐 듯합니다. 아말렉 사람 일부가 모여 살고 있었던 동네를 아말렉 골짜기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토종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아말렉 사람이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게 부끄러운 일인 것이지요.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속당한 이방 족속이 오히려 언약 관계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서 군대를 보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그렇게 큰 지파가 아닙니다. 시므온 지파처럼 유다 지파에 의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여호와의 전쟁에 빠지고, 베냐민 지파만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에브라임 이상으로 강성했지만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름 자기들만의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른 지파들도 모두 다 참여하기 어려운 이유는 있었을 것입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가장 강성한 지파가 마음의 문을 닫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장자의 책임을 회피한 유다 지파
이런 유다 지파의 태도는 결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위치 상 팔레스타인 남단에 위치했기도 하고, 가나안 독립 전쟁에서도 어느 지파보다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기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는 영적인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후 다윗에 의해서 통일 왕국을 유다 지파 중심으로 건국하지만,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지파와 나머지 지파로 연합한 북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유다 지파에게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유다 지파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했는지 불참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 동맹체에서 점점 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장자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르우벤 지파
다음으로 마길이 군대를 보냈다고 했는데, 마길은 므낫세의 큰 아들의 이름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형제 지파로 맏형이라는 책임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아래 편에 있었던 잇사갈 지파 역시 군대를 보내어서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잇사갈 지파 바로 옆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르우벤 지파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에 큰 반성이 있었다, 개역개정에 다르면 큰 결심이 있었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끝없이 토론만 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참여할지 안 할지 토론만 하다가 결국 군사를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르우벤은 처음부터 장자로서 역할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장자로서 본을 보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약했던 잇사갈 지파도 군사를 보냈는데, 르우벤은 꼼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영향인지, 요단강 동쪽의 세 지파 중 하나인 갓 지파 마저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이 바로 갓 지파가 거주하는 땅입니다. 그리고 단 지파는 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셀은 바닷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두 지파는 해안가에 위치한 지파인데, 먹고살기 바빴는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었던 전쟁의 당사자인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는 당연히 군사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어짜피 이대로 있으면 지파의 명운이 끝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습니다. 사실 모든 지파가 전쟁에 참여함이 옳고, 그리고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 이상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형제를 도와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한 뜻으로 마음을 모아 이웃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어 나아갔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겠습니까? 사실 한몸을 이루었다면, 가나안의 압제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라도 모인 것이 기적인 것이지요.
여호와의 전쟁의 특징
드보라는 이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여호와의 전쟁, 즉 영적인 전투의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시면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고, 그 다니는 길에서 싸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람이나 벼락, 폭풍우와 같은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 시스라의 군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의 구백 대의 철 병거를 향해 돌진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일기를 변화시켜 기손 강이 집중 폭우로 인해 범람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왕 야빈이 자랑하던 철 병거가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곧곧에 하나님이 자연의 운행 가운데 개입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출애굽 때에 갈라진 홍해에 다시 물이 흐르게 하여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실 때 풍랑이 일었지만 주님의 말씀 앞에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기대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까지도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를 대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때로는 자연을 통해 인간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손히 바라보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철 병거를 의지하던 시스라의 패배는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시편 127편에서 지혜자 솔로몬이 말한 권면을 기억해 봅시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건축자들은 헛수고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지키는 것도 헛일입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도, 고생해서 얻은 것을 먹는 것도 헛됩니다."
저주받은 메로스, 축복받은 야엘
이스라엘이 곤경에 빠졌을 때 드보라는 적을 치는데 돕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23절에서 메로스라는 지명을 저주하는데, 메로스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 구절에서 한번 언급됩니다. 사마리아 북방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라고 추정되기도 하고, 남방 유다 쪽에 위치한 도시일 것이라고도 추정합니다.
도시의 위치가 어디든지, 드보라는 이스라엘 형제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강력하게 저주하고 있습니다. 23절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저주하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짊어지고 아픔을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드보라는 메로스와 반대로 적군 총사령관 시스라를 죽인 헤벨의 아내 야엘을 칭찬했습니다. 야엘은 자신의 족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위해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였습니다. 드보라는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야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들보다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안위와 편안함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형제들을 섬기는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물론 우리가 형제 사랑으로 서로 연합함에 힘쓰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연합함의 목적이 그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 그 자체로도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 사랑을 하고 연합하는 까닭은 바로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서 일으키신 가나안과의 기손 강 전투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바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하며 누리는 일입니다. 손해 볼까 봐 남 좋은 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점차로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야엘과 같은 이들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여성임에도 홀로 전쟁에 참여하여 길목에 기다렸다가 적장 시스라의 생명을 취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아말렉 사람들은 그 조상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하나님을 알고 깨달아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함으로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얻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결국 가장 귀한 보화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가장 끝까지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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