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8장 16절-32절 광야로 사흘길을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by 알렉스강 2024. 8. 2.

출애굽기 8장 16절-32절 새번역

1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에게 일러, 지팡이를 내밀어 땅의 먼지를 치라고 하여라. 그러면 이집트 온 땅에서 먼지가 이로 변할 것이다."

17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서 팔을 내밀어 땅의 먼지를 치니, 먼지가 이로 변하여, 사람과 짐승들에게 이가 생겼다. 온 이집트 땅의 먼지가 모두 이로 변하였다.

18 마술사들도 이와 같이 하여, 자기들의 술법으로 이가 생기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가 사람과 짐승에게 계속하여 번져 나갔다.

19 마술사들이 바로에게 그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0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바로 앞에 나서라. 그가 물가로 나갈 것이다. 그 때에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여라.

21 네가 나의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나는,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과 너의 궁궐에 파리를 보내서, 이집트 사람의 집집마다 파리가 들끓게 하고, 땅도 파리가 뒤덮게 하겠다.

22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을 보내지 않아서,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 주가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23 내가 나의 백성과 너의 백성을 구별할 것이니, 이런 이적이 내일 일어날 것이다' 하여라."

24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시니, 파리가 무수히 바로의 궁궐과 그 신하의 집과 이집트 온 땅에 날아 들었고, 그 땅이 파리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

25 그러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서 말하였다. "이제 너희는 가되, 이 땅 안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26 모세가 말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므로 이 땅 안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면, 그들이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우리를 돌로 치지 않겠습니까?

27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광야로 사흘길을 나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28 바로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내보내서,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겠다. 그러나 너희는 너무 멀리는 나가지 말아라. 그리고 너희는 내가 하는 일도 잘 되도록 기도하여라."

29 모세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제 제가 임금님 앞에서 물러가서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 임금님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임금님이 우리를 속이고 백성을 보내지 않으셔서 우리가 주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0 모세가 바로 앞에서 물러나와 주님께 기도하니,

31 주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파리가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에게서 모두 떠나서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하셨다.

32 그러나 이번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리고,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출애굽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보면서, 자칫 하나님과 바로가 서로 싸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사실 심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심판을 행하시고, 상대를 치십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통치자이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착각합니다. 이 착각오르 자신의 배를 불리고자 권력자들은 인간을 소유물처럼 취급하여 노예로 삼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일깨워주십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삶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재앙의 사건을 통해 이 차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재앙이 진행될수록 바로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집착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자로서 구별됩니다.

 

세 번째 이 재앙

먼저 세 번째 재앙인 이 재앙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낸다는 약속을 어기자 곧바로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땅의 티끌을 치라고 명하셨고, 아론이 순종하자 티끌이 이가 되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킨님כִּנִּים"인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성경 외의 경전인 페쉬타, 탈굼, 탈무드 등에서는 이를 이 또는 빈대로 번역하고, 칠십인역의 경우 모기로 번역했습니다.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작은 티끌과 같은 존재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바로가 티끌과 같은 존재에 항복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티끌로도 큰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것도 중요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작은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티끌과 같은 존재인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7절입니다.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서 팔을 내밀어 땅의 먼지를 치니, 먼지가 이로 변하여 사람과 짐승들에게 이가 생겼다. 온 이집트 땅의 먼지가 모두 이로 변하였다.” 열 가지 재앙을 자연현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재앙들을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서 유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일강은 7월과 8월에 집중호우로 범람합니다. 어느 해 나일강 상류의 평년과 달리 큰 집중호우로 인해 붉은 흙이 쓸려와서 물이 붉어졌을 수 있습니다. 하류에는 비옥한 충적토가 형성되었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많이 생겨서 유기물로 인해 파리와 모기와 같은 해충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을 잡아먹는 개구리도 자연스럽게 많아졌습니다.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까지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연 현상을 이용하신다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을 갈등 관계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과학을 경계했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와 과학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찾고 대화를 시도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진화론입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이후 진화론은 기독교 창조론을 공격하는 주요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종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주장과, 한 종에서 다른 종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 당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포인트를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원숭이와 인간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주장에 거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 하나님 뜻에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우연히 이루어졌는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만물이 진화의 법칙에 의해 생겨났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났다면 창조 신앙과 어긋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병이 낫기를 원하다가, 어떤 분의 소개로 좋은 약을 찾아 먹고 낫게 되었다면, 이 두 개 모두 병이 치료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사람을 만나 좋은 약을 먹게 된 과정 모두가 하나님이 조화롭게 인도하신 일입니다. 출애굽기의 재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굳이 틀렸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반드시 옳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핵심은 이 일에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통해 애굽과 바로를 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여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을 알리려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연현상을 이용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다스리심을 분명히 나타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자연현상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만, 특별한 자연 현상도 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학이나 마술은 하나님의 권능을 흉내 낼 뿐이다

18절과 19절입니다. “마술사들도 이와 같이 하여, 자기들의 술법으로 이가 생기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가 사람과 짐승에게 계속하여 번져 나갔다. 마술사들이 바로에게 그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굽의 마술사들은 이번 재앙을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도 항복하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권능은 히브리어로 에츠바אֶצְבָּע인데, 정확하게는 손가락을 의미합니다. 애굽 마술사들은 이 일이 하나님의 손으로만 가능하다 실토한 것입니다. 세상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하나님의 권능을 정말 일부분 미약하게나마 흉내 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만드신 자연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 없을뿐더러, 더 나아가 생명 탄생과 같은 자연의 현상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욥기 39장을 보면, 욥은 창조 세계가 혼돈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물들이 공존해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시면서, 이 가운데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가 있기에 혼돈 가운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타조는 자기가 낳은 알을 땅에 묻어둔 뒤 그 알을 낳은 것을 잊고 스스로 밟아 깨트릴 정도로 어리석지만, 그 대신 빠른 다리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상황조차 크신 섭리로 다스리고 이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현상을 설명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애굽 마술사의 흉내내기 정도일 뿐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는 애굽 마술사의 말을 듣고 지금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바로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시편 10편 4절의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정신 차리지 못하는 바로에게 또다시 연속적으로 재앙을 내리십니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 재앙입니다. 이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침 일찍 나일강으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바로는 세 번의 재앙을 맞고도 아직도 나일강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파리 떼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파리 떼가 집집에 가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파리는 한 마리만 있어도 성가십니다. 그런데 온 집에 파리가 가득하여 화장실과 식당을 오고 갈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어떤 번역에는 파리를 등에라고 번역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게는 피를 빨아먹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내가 나의 백성과 너의 백성을 구별할 것이니

파리 재앙부터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의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동일하게 경험했지만, 파리 재앙부터는 애굽 사람에게만 국한됩니다.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을 보내지 않아서,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 주가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백성과 너의 백성을 구별할 것이니, 이런 이적이 내일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과 사단에 지배받는 세상 백성을 구별하십니다. 현실 속에서 겉보기에는 세상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은 구분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로 분명히 구분되어, 종말 추수 때 그 소속에 따라 형벌과 보상을 주십니다.

 

요셉 때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고센 땅에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주지를 구별하셨습니다. 고센 땅은 목축하기에도 좋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여 고센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일방적 은혜입니다. 전능자이시자 섭리주이신 하나님의 손길에 나를 맡기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구별과도 같습니다. 하나님 손길에 맡기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분명한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구별의 기준은 모든 원인을 하나님으로 보고 인정하는지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나를 아느냐? 모르느냐?” 물으시며, 모든 것에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구별점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결국 하나님 자신을 이 땅 가운데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잘나서 고센 땅과 같은 좋은 곳에 산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선택받았으니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결과적으로 은혜로 고센 땅에 거하게 되었지만, 그 땅이 언제 황폐화될지 모릅니다. 땅은 그저 땅일 뿐입니다. 그리고 좋은 땅에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 애굽의 종살이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리가 분명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이 나 혼자 잘먹고 잘살거나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만을 드러내기에 마음을 쏟는 것이며, 내가 잘 난 것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려고 한다

바로는 두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만, 자꾸 조건을 붙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서 말하였다. 이제 너희는 가되, 이 땅 안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라.” 바로는 애굽 땅을 벗어나지 말고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광야로 사흘길을 나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모세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애굽 땅이 아니라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힙니다. 사흘길쯤 간다는 것은 결국 자유를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어떻게든 그들을 묶어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의 것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묶어두려 합니다. 넘어지는 곳에서 계속 넘어지게 하고, 실패하는 곳에서 자꾸 실패하게 합니다. 결국, 내가 구별되었음을 스스로 선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거절하자 바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내보내서, 너희가 광야에서 주 너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겠다. 그러나 너희는 너무 멀리는 나가지 말아라. 그리고 너희는 내가 하는 일도 잘 되도록 기도하여라.” 바로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합니다. 죄악과 죽음이 다스리는 애굽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것이 출애굽의 의도인데, 바로는 다시 돌아오도록 붙잡으려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등 돌리지 말라며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께 놓고 살아가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은 누구 편에 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섭리자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