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2장 1절-7절 새번역
1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 싸울 준비를 하고 요단 강을 건너 사본으로 와서, 입다에게 말하였다.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
2 그러자 입다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힘겹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3 너희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에게 쳐들어가니,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의 손에 넘겨 주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 너희가 이렇게 올라와서 나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느냐?"
4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 싸워 무찔렀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평소에 늘 길르앗 사람들을 보고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다!" 하고 말하였다.)
5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앞질러서 요단 강 나루를 차지하였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이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에게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6 그에게 쉬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시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 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
7 길르앗 사람 입다는 여섯 해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다.
유순하지 못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입다의 개인적 비극에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이 이어집니다. 입다는 성공과 실패가 반복된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입다는 길르앗 사람의 지도자로 이스라엘과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경솔히 행한 서원으로 인해 하나뿐인 딸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기쁨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를 찾아와 전쟁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람 중에는 남에게 습관적으로 시비를 거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순하게 말하지 못하고 사람의 분을 돋우는 경우입니다. 촌철살인 같은 말로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입니다. 처음에는 말을 잘한다, 통찰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거북해하고 피하게 됩니다. 상대가 센 사람일 경우에는 더 강한 말로 되치기 당하여 공격받기도 합니다. 자기가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상처 받았다고 원망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요. 좋은 말은 못 할 망정, 결국 세치의 혀로 남의 인생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 개인만의 일이 아닙니다.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말과 태도가 가족이나 집단, 공동체 안에 자리 잡아,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중 하나인 에브라임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에브라임은 성깔이 고약하고, 입만 열면 거칠고 협박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힘이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있다면 본인이 솔선수범하여서 희생을 치른다면,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하지 않고 공만 챙기려는 사람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에브라임 지파
에브라임 지파의 나쁜 버릇은 기드온 때에도 비슷한 일로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를 중심으로 북쪽의 여러 지파와 힘을 모아 미디안의 주력 부대를 격파합니다. 이후 사자들을 보내어서 미디안의 잔존 병력을 함께 격파하자고 제안합니다. 에브라임은 후속 작전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적장을 사로잡아 죽이는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에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에게 찾아가 자신들을 대접해 주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기드온은 지혜롭게 양보하고 물러났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을 통해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미 암몬과의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무장한 채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입다에게 시비를 걸며 심한 말을 했습니다. "너와 네 집을 불살라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딸을 불살라 죽여야 했던 입다에게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불붙은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의 지나친 오만함과 권력욕에서 나온 매우 악한 말과 태도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하찮게 생각하는 길르앗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창녀의 아들인 입다가 이스라엘 권력 중심에 서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계속 특권을 누려왔던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에서 최고여야 하고, 지도자도 에브라임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우월감과 교만, 특권의식이 에브라임 지파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지파가 아닌 이스라엘의 골칫덩이 지파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주인이기에 겁나는 것이 없다
이렇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상석에 앉아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인이 주인이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사는 관계에 서로 갈등하기 마련이고 상대에게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자존심 상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인간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결국 인간이란 티끌이라 다 먼지로 끝나버릴 인생인데, 하나님 자녀라는 정체성만 있다면 남이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대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움이 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니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고, 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나다
그런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임자를 만납니다. 기드온의 경우는 물러났습니다. 잃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다릅니다.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보통이 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딸 문제로 심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불을 던진 것입니다. 입다가 한수 아래였다면 바로 노하면서 덤벼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극도로 자제하면서, 먼저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에브라임 지파의 거짓 주장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리로 시비를 따졌습니다. 2절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힘겹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입다의 반박에 에브라임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길르앗 사람 전체를 비난했습니다. 4절 말씀 후반부입니다.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로, 길르앗 사람들을 비겁자라 부른 것입니다. 마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이야기였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 시 요단강 동편을 먼저 정벌하였습니다. 그리고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인 길르앗이 요단강 동편에 머물기를 희망했습니다. 물론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가 정복전쟁을 도왔지만, 먼저 좋은 것을 차지했다는 것으로 인해 다른 지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비겁자라는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오랫동안 묵은 감정을 자극하여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말에 길르앗 사람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입다도 이제는 길르앗 사람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을 제대로 못 하면 죽는다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이끌고 나아가 분노의 힘으로 에브라임 사람들을 단숨에 격파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망쳤고,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나루터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려내어 죽였습니다. 나루터를 건너는 사람마다 요단강을 가리키는 흐르는 물이라는 뜻인 쉬볼렛을 발음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쉬볼렛이 아니라 시볼렛이라 발음했다면 에브라임 사람으로 여겨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이때 에브라임 장정이 무려 4만 2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전쟁에 나갈 장정 대부분이 죽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에 전쟁이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내전이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걸고 싸우다가 결국 에브라임에 싸울 장정이 없을 때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말로 남을 상하게 한 사람은 자신도 말로 망하게 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도 발음을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발음만 못했겠습니까? 유순한 말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상처를 주는 것은 결국 교만 때문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판단하는 말을 하기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교만이 나를 죽이는 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남을 비난한 잣대로 결국 나도 판단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7절에서,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명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약육강식으로 살아간다
결국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 안에 뿌리 깊은 파벌주의와 패권주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칼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이런 죄성은 에브라임 지파만의 것이 아닙니다. 에브라임만큼 강했던 유다지파도 그랬고, 다른 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갈등의 뿌리로 계속 작용합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문제가 되고,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될 때에도 지파 간의 갈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유다와 에브라임 중심으로 하는 나머지 지파로 나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세상 나라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서로 경쟁할 때 나오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모습이 나오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소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망각한 지파 간의 세력 다툼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입은 말을 제대로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을 보면 유독 말에 대한 교훈이 많습니다. 사람의 지혜로움이 다름 아니라 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잠언 18장 6절에서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했습니다. 바로 에브라임 지파를 향한 말입니다. 잠언 10장을 보면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고,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한다 했습니다. 차라리 말에 자신이 없으면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침묵으로 일관할 뿐입니다. 말을 아끼고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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