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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13장 17절-22절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by 알렉스강 2024. 8. 12.

출애굽기 13장 17절-22절 새번역

 

17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블레셋 사람의 지름길이 아니라 홍해 광야 길로 둘러 가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각 지파별로 대열을 이루어 나왔으며, 그들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은 왕의 대로라는 상업 도로로 지중해 해안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이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으로 빠르면 5일 안에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가나안 땅과 반대되는 남쪽 방향인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름길 대신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할 가능성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따르면, 지름길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을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곳은 애굽의 국경수비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게 해 지역에 살던 사람인데, 지중해 바다를 건너서 가나안 땅 해안선 일대를 차지하고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이 길로 지나가려면 블레셋과의 전투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애굽에서의 430년 동안의 생활로 인해 애굽을 유일한 세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그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한 바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고 그들을 치심으로써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이 바로 이로 인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안전한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치 초신자들이 큰 시험에 빠져 믿음이 흔들릴까 봐,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돌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견딜 수 있게 해 주십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생물처럼 자라나고 변화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뜨거울 때가 있지만, 때로는 잠잠해질 때도 있습니다. 초신자가 처음부터 큰 고난을 겪으면, 믿음을 포기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특별히 배려하시고 돌보십니다. 이때의 경험을 두고 '초신자의 행운'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즉각 응답해 주실 때가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배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고, 그 기둥들은 백성들 앞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려면, 태양의 강렬한 빛과 비바람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성장한 믿음은 결국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남쪽 홍해 광야로 인도하신 길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길은 좁고 힘든 길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예레미야 2장 6절은 그 길을 "사막과 구덩이, 건조하고 어두운 땅"이라고 묘사합니다. 그 길은 누구도 다니지 않고, 살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려운 길로 백성을 인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자라나도록 배려하시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돌봄과 시련 두 가지 모두를 적절하게 허락하십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가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됩니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평안히 믿음의 길을 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이 결코 넓고 편한 길이 아님을 명확히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인도함을 받던 길은 좁은 길보다 더 힘든, 아예 길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 광야의 길은 길이 없는 곳이기에,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어제의 인도함이 오늘의 길을 보장하지 않으며, 매일 새롭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의 삶도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으며, 장래를 대비하려는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마치 노후를 대비하는 것처럼 철저히 계획하고 예측하려 하지만, 삶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서서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강둑을 높이 쌓아도 집중호우로 무너질 수 있듯이, 우리의 계획 역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강둑을 쌓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강둑을 짓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온갖 좋은 방법을 동원해서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해도, 하나님이 그날 밤에 우리의 생명을 거두신다면 모든 준비는 헛된 것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지만,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죄와 의, 심판에 대해 깨닫고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되게 합니다. 성도의 인도함은 단순히 결혼이나 직장, 사업 등의 개인적인 문제를 원만하게 잘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과 고난과 역경과 시험이 있어도 그 가운데 얼마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그의 길이 항상 명확하게 열렸던 것은 아닙니다. 아시아로 가고자 했지만 마케도니아로 인도된 것처럼, 그의 계획과 생각이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심한 고난을 겪으며,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계획하고 이루려는 모든 것들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 계획이 무너질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며, 편안히 산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지만, 그 인도하심은 결국 십자가로 이끌었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나, 그의 삶은 죽을 정도로 고난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고자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세상의 줄을 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오늘 본문에서 짧게 언급된 요셉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던 인물입니다.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때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요셉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을 함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때에 이르러 가나안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야곱과 온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은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400년이 지나 장정만 6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큰 그림이 깔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분깃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임을 알았다

요셉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4절부터 26절까지 말씀입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이 백열 살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은 그의 시신에 방부제 향 재료를 넣은 다음에, 이집트에서 그를 입관하였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으로 옮길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집트의 장례법에 따라 미라로 보존된 자신의 시신이 언젠가 가나안 땅에 묻히길 원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부탁이 아닌, 반드시 이행해야 할 명령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누리는 풍요에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뿌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자 신앙의 계보를 잇는 자로서, 아브라함의 축복의 언약을 계승하는 축복의 자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신의 분깃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임을 분명히 알았으며, 그 땅에 묻히고자 했습니다. 비록 애굽의 고센 땅이 가나안보다 비옥하고 현실적으로 더 나은 곳이었을지라도, 요셉은 그것을 자신의 영원한 유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린 애굽의 축복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을 고난 중에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이라고 믿었으며, 영원한 가치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현실적인 이익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애굽의 풍요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러한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요셉은 자신의 유골이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결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기억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

요셉이 가나안 땅에 대한 강한 사모함을 가졌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셉에게 가나안 땅은 좋은 기억이 많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이 태어난 고향이 아닙니다. 외삼촌이 살던 밧단 아람이라 불리는 하란에서 태어났고, 대여섯 살쯤 되어서야 가나안의 세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겜에서는 누나 디나가 세겜 족속에게 험한 일을 당했고, 그로 인해 형들이 세겜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건 이후, 가나안을 떠나던 길에 요셉은 자신의 생모 라헬을 잃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열 살 정도였을 때, 어머니 라헬이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이 살던 헤브론에서 자라났습니다. 이곳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특별히 장자에게 입히는 채색옷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이 그를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가족과 떨어져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가나안 땅에서 겪은 기억은 이처럼 대부분이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결국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가나안은 그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시절은 어린 시절이라 기억조차 희미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을까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그에게도 중요했으며, 그는 이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셉이 사모한 가나안 땅은 단순히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실의 땅을 넘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 하나님의 백성이 거할 영원한 안식처를 상징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그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사모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기억이 좋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이 가장 좋은 것이었기에, 자신의 시신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언약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요셉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그 믿음, 그 언약에 대한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