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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출애굽기 10장 21절-29절 사흘 동안 짙은 어둠이 내렸다

by 알렉스강 2024. 8. 7.

출애굽기 10장 21절-29절 새번역

 

2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로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손으로 더듬어야 다닐 만큼 짙은 어둠이 이집트 땅을 덮을 것이다."

22 모세가 하늘에다 그의 팔을 내미니, 이집트 온 땅에 사흘 동안 짙은 어둠이 내렸다.

23 사흘 동안 사람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고, 제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빛이 있었다.

24 바로가 모세를 불러들여서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주께 예배하여라. 그러나 너희의 양과 소는 남겨 두고, 너희의 아이들만 데리고 가야 한다."

25 모세가 대답하였다. "임금님도 우리의 주 하나님께 바칠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더 보태 주셔야 합니다.

26 우리는 우리의 집짐승을 한 마리도 남겨 두지 않고 다 몰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는, 우리가 어떤 것을 바쳐야 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27 주님께서 바로가 고집을 부리도록 하셨으므로, 바로는 여전히 그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28 바로가 모세에게 소리쳤다. "어서 내 앞에서 썩 물러가거라.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네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날에는 죽을 줄 알아라."

29 모세가 말하였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나도 다시는 임금님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겠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열 번에 걸친 재앙에 이르기까지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끝내 내보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바로를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교만하고 아둔한 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기 9장 16절에서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출애굽기 10장 2절에서 밝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한 두차례의 재앙보다 열 차례에 걸친 재앙은 확실한 학습효과를 가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재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 재앙을 일으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후대에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경배하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대적에게도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대적과 원수들 조차도 하나님을 알아보고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바로는 쉽게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흑암 재앙

오늘 본문은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재앙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1절부터 23절까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로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손으로 더듬어야 다닐 만큼 짙은 어둠이 이집트 땅을 덮을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다 그의 팔을 내미니, 이집트 온 땅에 사흘 동안 짙은 어둠이 내렸다. 사흘 동안 사람들은 서로 볼 수도 없었고, 제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빛이 있었다." 흑암은 3일 동안 가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해서 모든 것이 마비되었습니다. 흑암의 재앙은 메뚜기 재앙 이상의 재앙입니다. 메뚜기가 애굽의 경제를 파탄냈다면, 이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인간 활동이 마비된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관 속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흑암 재앙은 태양이 죽은 것입니다. 이는 애굽의 대표적인 태양 신 라에 대한 심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짙은 어둠, 앞을 분별할 수 없는 흑암이 애굽을 덮었습니다. 애굽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곳이며, 바로 자신도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양 자체를 가려버림으로써 그들의 우상숭배를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어둠은 마지막 심판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어둠이야말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본질적 특징임을 밝힙니다. 어둠은 창조 이전의 모습, 공허하고 텅 빈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으로 나아가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설명할 때,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골로새서 1장 12절과 13절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을 불러내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과 동일하게 여기고, 단지 또 다른 종교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율법적인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규칙과 의식을 통해 신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입니다. 종교는 종종 두려움과 의무감에 기반하며,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경험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잘못된 신앙의 함정에 빠집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종교적인 의식이나 교리에 집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진정한 신앙이 아닌,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구원은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규율에 매이기보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그 관계 속에서 깊은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신뢰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실천하면서 더 굳건해집니다. 이러한 관계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바로의 입장이 뒤바뀌다

24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들여서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주께 예배하여라. 그러나 너희의 양과 소는 남겨 두고, 너희의 아이들만 데리고 가야 한다.” 바로는 모세에게 예배를 허락하면서도 여전히 조건을 겁니다. 양과 소는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늘 조건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말고 애굽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멀리 가지 말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내산까지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장정만 가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안 됩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가야 합니다. 이제 사람은 다 가도 된다고 했지만, 경제 기반인 양과 소는 놔두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조건을 걸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는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제안을 당연히 거부합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임금님도 우리의 주 하나님께 바칠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더 보태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집짐승을 한 마리도 남겨 두지 않고 다 몰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는, 우리가 어떤 것을 바쳐야 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모세는 당차게 거절합니다. 오히려 더 크게 요구합니다. 바로에게 예배드릴 제물로 가축을 더 보태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바로가 거절할 것을 알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강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협상을 해나갈 때, 자기 소신을 끝까지 지키는 경우 이렇게 주도권이 바뀝니다. 모세가 바뀌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합니다. 만약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모세를 협박했습니다. 모세는 아쉬울 것이 없다며 다시 보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보지 않겠다 했던 사람과 다시 만나는 일이 흔합니다. 사람의 말은 결국 바뀌게 마련입니다. 결국 이들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가 모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은 바로 자신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홉 가지 재앙을 겪으며 바로는 모세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모세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특별히 보호하셨고,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는 이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모세를 해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고 해치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죽음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바람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과 흑암 재앙을 통해 애굽의 경제와 사회 시스템을 모두 치셨습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먹을 것이 남지 않아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온 하늘을 뒤덮어 가득할 때에도 마치 흑암과 같았을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이 끝나고 괜찮을 줄 알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해가 가려져 흑암 가운데 사흘 동안 겪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때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는 두려움을 직면했습니다. 완전한 죽음의 두려움이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애굽이 가졌던 온갖 부와 힘과 명성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화려했던 문화와 부강한 경제는 이제 시들어 말라 죽어가는 들풀일 뿐입니다.

 

우리의 외모, 지식, 사회적 지위, 부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감사함으로 여기며 잘 선용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보다 의존한다면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계속 집착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나 없이 괜찮은지 보자고 하시면서 잠시 뒤로 물러나 지켜보십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와서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설령 잘 지켜본들, 결국 언제가 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릅니다. 메뚜기 재앙과 같은 것이 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고, 인생을 흑암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처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헤매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바람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