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새번역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거룩한 주저함
인생을 살아가면서 묻는 중요한 질문은 단순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왜 그러한가? 끊임없이 사유를 해가면,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근본적인 존재 물음입니다. 앞서 말한 네 가지 질문 중에서도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나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질문은 바로 왜라는 물음입니다. why me? 왜 나인가?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꼭 나 이어야만 하는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물으셨습니다. 아버지 왜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저도 가급적이면 이 잔이 나에게서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이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주저함이라고 부릅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직전 마지막 선택을 위한 숨고름이랄까요? 마치 등산할 때 정상에 이르기 직전 잠시 쉬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거룩한 주저함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한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후회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숙고해서 결정해야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특별히 생명과 같이 중요하고 희생이 필요한 선택인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진리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 역시 선택하여 끝까지 완주하려면 바닥까지 내려가서 결정해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역량으로는 인생의 어려운 과제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럴만한 위인도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도 않습니다. 주변에서도 나를 그렇게 평가하지도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이것을 누가 하게 만드는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나오는 답은 결국 하나님이 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실 모르기 때문에 이 대답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징조를 거부한 아하스
왜 나인가라는 거룩한 주저함은 신앙의 갈림길에 매번 마주하는 질문입니다. 악인도 의인도 동일하게 받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이 다를 뿐입니다. 악한 왕이라 불리는 유다 왕 아하스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7장은 남유대 왕 아하스가 통치하던 시절 급변하던 정세 속에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놓은 남유대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하스는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두 나라부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앗시리아의 침공에 맞서 연합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를 괘심 하게 여긴 두 나라는 유다를 침공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두려워하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징조를 보여주겠다고 말씀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 말하며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아하스가 거절한 것이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일이라 비난합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예언이 바로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과 16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 이름이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출생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가 되어서, 아이가 철이 들기도 전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망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거절한 것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기 싫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회피한 것입니다. 아하스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남유다는 망할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으면 왕과 백성의 마음이 바람에 숲이 흔들림 같다고 말했겠습니까? 아하스도 이 순간 이런 질문을 했을지 모릅니다. 왜 하필 내가 왕이 되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굳이 나이어야만 하는가?
아하스는 이 질문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 상황을 직면하여 믿음으로 타개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서 마땅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즉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시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징조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비겁하게 문제를 회피하고 어떻게든 나 한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도망치려 한 것입니다.
용기와 비겁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 두 경우로 나누어집니다. 용기 있는 사람과 비겁한 사람입니다. 왜 나 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피하지 않고 그 문제를 자신의 존재로 다 받아들이며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무엇조차 시도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능력이 별로이고 연약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마주하는 운명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피할 수 없다면 담담히 감당하며 살아내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비겁한 사람은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욕도 얻어 먹지 않습니다. 반대로 시도하지 않기에 성공도 할 수 없고 칭찬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니 실패도 성공도 없고, 욕도 칭찬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간절함도 없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절실히 노력하고, 그리고 심지어 징조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뜨겁거나 차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사람들을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경고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사람들이 바로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기에, 소중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립니다. 결국 주인이 돌아와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둔 종을 질책하며 그 달란트를 빼앗아 열달란트 남긴 자에게 준 것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아버지 목수 요셉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늙은 나이에 약혼한 여인 마리아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분노했음이 마땅합니다. 당시 시대의 기준으로는 이 일로 모세의 율법으로 고소를 하면 마리아를 죄책 하여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와 그 태중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이 일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덮고 관계를 끊고자 했습니다.
요셉도 인간인데, 얼마나 속상하고 짜증이 났겠습니까? 대단한 부와 명예를 구했던 것도 아닙니다. 홀아비로 지내다 이제 겨우 집안도 변변찮은 평범한 한 여인과 결혼하고자 한 것인데 엉망이 된 것입니다. 일반적은 사람들 경우에는 별 문제 없이 잘 진행될 일이 자신에게는 불경스러운 일로 발생한 것이지요. 이 순간 요셉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나 이어야만 할까?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왜 나에게는 이런 불행이 찾아왔는가?
사실 답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부모가 죄를 지어서도 아니에요. 모르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의 말로 굳이 답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하신 거에요. 예수님은 나면 서부터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왜 나인가에 대한 답이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몫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에요. 요셉은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불행 앞에서 의심을 하였습니다. 마리아와 태 속의 아이는 나의 잔이 아니니, 그냥 피해 갈 수 있다면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안 지나가는 거예요.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피할 수 없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 사실을 요셉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여기고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합니다. 천사가 괴로워하는 요셉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게 앞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에게 위로하고 용기를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셉도 아하스와 같이 동일한 메시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22절과 23절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요셉은 천사가 자신에게 주고 간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핵심인 마리아의 태 중의 아이를 바로 자신의 징조로 여겼습니다. 이 아이를 예수, 이스라엘의 모든 고통과 불행에 놓인 자들을 구원할 이름, 그리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의 이름으로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징조 여겼기에,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에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겁한 자에서 용기있는 자로
원래는 그 인생이 참으로 비겁했지만, 하나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에 결국 순종하여 그 소명을 감당한 한 인물이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했기에 거룩한 주저함 가운데 징조를 구하였고, 그 징조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위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 시절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손에 넘어가 가혹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 놓으면 먹을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기드온은 기질이 매우 신중하고 꾀가 많은 사람이라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을 미디안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국 주변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고자 밤에 몰래 그것도 포도주 틀에서 밀이삭을 타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찾아온 것입니다. 너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그 말을 들은 기드온은 되물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계신다면, 왜 우리가 미디안에게 고통을 받습니까?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며 따지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건 주님이 우리를 버린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너에게 있는 힘을 가지고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라 내가 너를 보낸다" 너에게 있는 힘, 이미 하나님이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 그 받은 힘으로도 충분히 네가 마주하는 불행, 온 이스라엘이 고통받고 있는 이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야.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당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소명인지, 그리고 그것을 믿고 감당하는 마음이 내게 진심으로 있는지 그게 핵심이고 전부라는 것입니다.
징표를 구한 기드온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왜 나 이어야만 합니까? 이스라엘에는 나 말고도 더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많은데, 왜 제가 해야 합니까?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도 나는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이렇게 기드온은 사명을 감당하기 직전 거룩한 주저함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저함 끝에 기드온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미디안과 싸워 몰아내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라면, 나에게 징표를 주십시오.
내가 우선 예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릴 테니 돌아올 때까지 떠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드온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요리를 하고, 밀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어서 상수리나무로 가져다가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에 가져다 놓고 국물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드온이 하니 천사가 지팡이를 내밀자 순식간에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고기와 무교병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 순간 기드온은 깨달았습니다. 진짜 주님의 천사구나, 그리고 미디안을 쳐 부수는 것이 나의 사명이구나. 그리고 이 제단을 여호와 샬롬,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후에 기드온은 자신의 모든 최선을 자신의 소명을 위해 다 허비합니다. 비록 작은 힘이고, 보잘것없지만, 하지만 이 힘만으로도 능히 감당하리라 믿고 감당합니다. 좌절이 없었겠습니까?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좌절도 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간절히 주님께 징표를 구했습니다. 한 번만이 아닙니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두려움이 가득 차 있을 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녕 지난번 말씀하신 대로, 나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셔야겠습니까?” 이 일을 꼭 제가 해야 합니까? 강성한 에브라임 지파도 있고, 더 힘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는데, 꼭 제가 해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기드온은 표징을 구하길,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겠는데, 이슬이 양털 뭉치에만 내리고 다른 땅은 모두 말라 있으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보니 땅은 말라 있고 양털뭉치가 이슬로 가득 져져 있어 손으로 짜니깐 그릇에 물이 가득 차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걸로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 이번에는 반대로 해 주십시오. 양털은 마르고 땅은 이슬이 가득 차게 해주십시오.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온이 구한 대로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양털은 말라 있고 사방의 모든 땅만 이슬로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표징 임마누엘 여호와 샬롬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표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표징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참된 표징입니다. 여호와 샬롬, 평안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바로 강력한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사실 기드온처럼 뭔가 대단한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무덤덤하게 요셉은 주의 사자가 분부한 대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감정이 어떠했는지, 생각이 어떠했는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일을 감당했던 것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사실 표징이란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표징은 요셉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평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에서 자라는 한 생명의 아버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 어떻게 보편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기적입니다. 삶이 그래서 신비입니다.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다
광야와 같은 인생에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이 찾아옵니다. 물론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도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의 함께 겪게 되는 불행이 있습니다. 누가 반드시 책임져야지 많은 이들이 살아날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 그랬습니다. 기드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무가치하게 또는 가혹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인생이 너무나 가치 있기에,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내가 피할 수 없는 마주쳐야 할 운명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폭풍우 치는 인생의 바다에서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다. 나 자신과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나의 인생을 사랑하겠노라 선언하는 것입니다.
풍랑이는 인생의 바다에서 만난 폭풍을 내가 짊어질 십자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기십니까? 물론 때로는 이 일로 거룩한 주저함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주저함 속에서 내가 마셔야 할 잔이라 여기며 묵묵히 그 잔을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샬롬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왜 나이어야 합니까 라는 부르짖음 속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거룩한 음성을 듣는 복된 사람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