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4장 1-8절
1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너울 속 그대의 눈동자는 비둘기 같고 그대의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 떼 같구나.
2 그대의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이 희구나. 저마다 짝이 맞아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3 그대의 입술은 붉은 실 같고, 그대의 입은 사랑스럽구나. 너울 속 그대의 볼은 반으로 쪼개 놓은 석류 같구나.
4 그대의 목은 무기를 두려고 만든 다윗의 망대, 천 개나 되는 용사들의 방패를 모두 걸어 놓은 망대와 같구나.
5 그대의 가슴은 나리꽃 밭에서 풀을 뜯는 한 쌍 사슴 같고 쌍둥이 노루 같구나.
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몰약 산으로 가려 하네. 유향 언덕으로 가려 하네.
7 아름답기만 한 그대, 나의 사랑,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구나.
8 레바논에서 오너라, 신부야! 레바논에서 오너라, 어서 오너라. 아마나 꼭대기에서,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들이 사는 굴에서, 표범들이 사는 언덕에서 내려오너라.
유대인들이 구약을 구분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구약성경 중 성문서집에 속하는 두루마리로 된 다섯 권의 책을 ‘메길롯’이라고 하는데, 그 다섯 권이란 아가서, 룻기서, 예레미야 애가서, 전도서, 그리고 에스더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아가서를 읽어나가고, 오순절에는 룻기서를, 장막절에는 전도서를,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그리고 성전파괴의 날이라는 중요한 절기가 있습니다. 이 날에는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어나간다고 하죠. 유대민족이 출애굽을 한 날을 기념한 유월절에 아가서를 읽으니 아가서가 구원과 생명을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가서는 원제목이 영어로 Song of Songs 곧 노래들 중의 노래란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쉬에르’(שִׁיר)가 ‘노래’ 즉 Song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이 ‘노래’ 곧 ‘쉬에르’가 처음 등장하는 게 어디입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이후 미리암의 노래에서 나옵니다.. 그때 미리암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가게 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이어지는 노래는 사사기에서 나오는 여선지자 드보라와 군대장관 바락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는 성전의 레위인들, 곧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들이 부른 노래에도 등장합니다. 그렇듯 미리암이 부른 노래, 드보라와 바락이 부른 노래, 그리고 성전의 제사장들이 부른 노래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연코 창조와 구원입니다. 생명을 만드시고, 생명을 소생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행위가 사랑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서에서 사랑은 단지 두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고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가서에서 나오는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부로 소개되는 자는 술람미라는 여인인데, 이 이름이 실은 샬롬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리고 신랑은 우리가 잘 알듯이 솔로몬인데, 이 역시 ‘샬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 각자 내면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 나 자신이 사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하나님과 나 자신의 은밀한 사랑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 4장은 결혼식장에서 솔로몬이 신부 술람미에게 전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당시 결혼식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식 모습이 실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합일을 이루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결혼하는 사건은 시내산 언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식을 체결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이 언약은 곧 일종의 혼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식 체결의 증표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수여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런 과정들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혼인식 과정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은 것은 사람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식 삼는 것이 타당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인간 중에서도 가장 말종을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신분적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들을 엮은 것은 오직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면, 신랑은 신부를 향해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두 번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너울 속 그대의 눈동자는 비둘기 같고 그대의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 떼 같구나.” 여기서 아름다워라는 표현은 신부가 대단한 미모를 가져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눈에 이뻐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볼품없고 초라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여쁘다고 여겨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거나 완벽한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물과 흠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사랑스러운 신부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고서 한 표현이지만, 솔로몬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다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원래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공식적으로 배다른 19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10번째 아들에 해당한 솔로몬은 왕위 계승 순위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다윗이 감추고 싶은 어둠이자 상처인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놀랍게 왕 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아’로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주시기까지 하셨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깊이 새기는 차원에서 이 아가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마치 하나님께서 작고 연약하고 볼품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사랑해 주신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앞서 읽은 1절에서 주목할 단어가 있는데 너울이란 말입니다. 신부가 쓰는 면사포를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신부는 너울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너울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비로움과 조심스러움을 상징합니다. 너울은 성경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창세기 24장에서는 리브가가 이삭을 만나기 전 너울로 얼굴을 가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삭은 리브가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너울 속의 신비감이 그를 설레게 했고, 리브가는 이삭과 사랑하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너울은 결혼식 전 신랑 신부가 서로에 대해 신비를 간직한 채 서로를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끌린다고 확 당기거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알듯 모르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밀당이라고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감 속에서 더 깊어질 때가 많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거나 모든 것을 다 드러낼 때, 서로에 대한 신비감과 긴장감을 잃게 되고 호감도마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베일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순한 신체적 아름다움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랑하는 이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을 넘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일에 가려진 것 같아 잘 보지 못한 것 같지만, 오히려 가려져 있기에 유심히 보는 것입니다. 서로 밀당하며 안보는 것 같지만, 한 순간이라도 포착된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심상이라고 하지요. 어떤 장면을 포착하여서 오랫동안 기억하려면 마음에 그려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멋진 곳에 가서 한 이삼십 분 바라보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장면을 마음에 그려놓으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 장소가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유명한 구절이지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아무리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진리는 어렵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진리가 명확하기에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쉽게 드러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진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신랑이 너울 너머의 신부의 얼굴을 보듯이 오랜 시간의 정성이 필요합니다. 한 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한 순간에 그 얼굴을 살짝 드러낼 순간을 포착해야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내면의 인격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드러나는 진심을 봐야 합니다. 그 진심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을 자꾸 상대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안목은 길러집니다. 그런데 영적인 안목은 조금 다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을 해야지 어느 순간에 눈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아가서 4장에서 신랑은 신부 술람미의 일곱 신체 부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 눈, 머리털, 이, 입술, 뺨, 목, 가슴이 그 대상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부분은 목입니다. 4절에서 신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목은 무기를 두려고 만든 다윗의 망대, 천 개나 되는 용사들의 방패를 모두 걸어 놓은 망대와 같구나.” 다윗의 망대는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 위에 세운 견고한 방어 시설입니다. 천 개의 방패로 무장된 이 망대는 술람미 여인의 목에 걸린 보석 목걸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보석은 단순히 화려한 장식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곧 희생과 헌신의 결과물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목을 망대에 비유한 것은 단지 외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강인하고 견고한 의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앙의 절개를 상징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얻어집니다. 신랑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가서 1장 5절에서 술람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로, 광야에서 살아가며 주로 흑염소와 검은색의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가면 베두인들이 광야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을 보면 검은색 천으로 옷이나 장막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신부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어두운 색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포도원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결과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삶은 희생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는 열등감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참된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외모로 열등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검게 그을린 피부는 당대의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예루살렘 여인들조차 그녀를 곱지 않게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열등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부족함이나 결핍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과 열등감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솔로몬 역시 술람미 여인의 열등감을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과 격려로 그녀를 감싸 안았습니다. 열등감은 충고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랑과 격려야말로 열등감을 치유하는 최고의 묘약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름답기만 한 그대, 나의 사랑,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구나.” 솔로몬의 이 고백은 술람미 여인이 객관적으로 흠 없는 완벽한 미인이어서가 아닙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객관적인 기준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생각해 볼 것은 우리 마음에는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것을 추구합니다. 결핍의 문제도, 사실은 완전을 추구하는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더 안전하고, 더 평안하고, 더 배부른 상태, 더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망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세상에 대한 쾌락적 욕구가 아닌 진리에 대한 추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게 없습니다. 앞서 신랑이 신부가 이쁘게 보인 것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한순간에 다 싫어집니다.
따라서 세상의 것에 대한 한계를 알게, 여전히 완전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진리를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렴풋이 진리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그 기대를 가지고 진리를 추구하고 탐구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진리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달리 완전 무결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갈망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는 솔로몬의 마음, 아름답기만 한 그대, 나의 사랑,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구나 라는 그 고백에서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술람미 여인이 완벽하듯이, 우리의 마음, 즉 우리 영혼에 하나님이 완전한 분으로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게 위해서는 반대로 우리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를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가 주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도 사람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쫓아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쫓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 하시면서 사랑스럽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힘을 내길 바랍니다. 세상 결핍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 없는 것 조금 불편한 것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자로서 사랑하는 자로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해 열등감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