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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사무엘상 2장 18절-36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리라

by 알렉스강 2025. 1. 5.

사무엘상 2장 18절-36절 새번역

 

18 한편, 어린 사무엘은, 모시 에봇을 입고 주님을 섬겼다.

19 사무엘의 어머니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매년제사를 드리러 성소로 올라가곤 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아들에게 작은 겉옷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20 그리고 엘리는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주님께 간구하여 얻은 아들을 다시 주님께 바쳤으니, 주님께서 두 분 사이에, 이 아이 대신에 다른 자녀를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복을 빌어 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축복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21 주님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22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저지른 온갖 잘못을 상세하게 들었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23 그래서 그는 그들을 타일렀다. "너희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느냐? 너희가 저지른 악행을, 내가 이 백성 모두에게서 듣고 있다.

24 이놈들아, 당장 그쳐라! 주님의 백성이 이런 추문을 옮기는 것을 내가 듣게 되다니, 두려운 일이다.

25 사람끼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중재하여 주시겠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변호하여 주겠느냐?" 아버지가 이렇게 꾸짖어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26 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네 조상의 집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지 않았느냐?

28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네 조상 아론을 선택해서, 나의 제사장으로 삼아, 나의 제단에 올라와 분향을 하게 하며, 에봇을 입고 내 앞으로 나아와 내 뜻을 듣도록 하지 않았느냐? 또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불살라 바치는 제물을 모두 너희의 몫으로 차지할 권리를, 네 조상의 집안에 주지 않았느냐?

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멸시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30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지난 날 나는, 너의 집과 너의 조상의 집이 제사장 가문을 이루어 언제까지나 나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만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1 내가 네 자손과 네 족속의 자손의 대를 끊어서, 너의 집안에 오래 살아 나이를 많이 먹는 노인이 없게 할 날이 올 것이다.

32 너는 고통을 받으면서,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에게 베푸는 복을 시샘하며 바라볼 것이다. 네 가문에서는 어느 누구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33 그러나 나는 네 자손 가운데서 하나만은 끊어 버리지 않고 살려 둘 터인데, 그가 제사장이 되어 나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되고, 희망을 다 잃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변사를 당할 것이다.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한 날에 죽을 것이며, 이것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35 나는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겠다. 내가 그에게 자손을 주고, 그들이 언제나 내가 기름부어 세운 왕 앞에서 제사장 일을 보게 하겠다.

36 그 때에 너의 집에서 살아 남는 자들은, 돈 몇 푼과 빵 한 덩이를 얻어 먹으려고, 그에게 엎드려서 '제사장 자리나 하나 맡겨 주셔서, 밥이나 굶지 않고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할 것이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2장의 배경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따라 살아가던 혼란과 타락의 시대입니다. 이는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정치적·종교적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엘리 제사장은 실로 성소에서 40년간 제사장 직분을 맡았던 당시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엘리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의 후손으로, 제사장의 적통 가문이었습니다. 본문 27절과 28절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으며, 그로 인해 백성들이 바친 화제에서 일부를 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제사장의 소명은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감당하는 영광스러운 책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러한 책임을 망각하고, 제사장의 직분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를 하나님께 바치기도 전에 제물을 강제로 취했습니다. 원래 화제는 불로 태워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린 후, 남은 부분을 제사장이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환을 시켜 갈고리로 고기를 휘저어 임의로 가져갔으며, 심지어 기름에 태우기 전 생고기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행하였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상습적이고 공공연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레위인 전체의 타락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본문 24절과 25절에서는 '범죄하다'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을 강조하는데, 24절의 '범죄하다'는 "지나다, 퍼지다"라는 뜻으로, 이들의 악행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이 표현도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만이 아니라 당시 레위인들이 엘리 아들처럼 타락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지파 곳곳으로 흩어져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 타락의 절정에는 이른바 지도층만이 아니라 종교인들의 타락이 함께 그려집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가 있었던 시대를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사사기 시대도 레위인들이 타락했고,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망할 때에도 거짓 예언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이 문제였습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사사기 시대 마지막을 레위인의 타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두 가지 예가 나오지요. 첫 번째가 유다 지파에 속한 레위인이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서 집안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적으로 일해야 하는데,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서 좋은 대우를 해주는 부잣집의 사적으로 활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단 지파는 자신들에게 할당 된 기업이 아닌 팔레스타인 북쪽 끝에 위치한 라이스를 점령합니다. 그런데 단 자손이 라이스를 정복하러 갈 때에 미가가 만든 신상들과 제사장을 데리고 갔다고 말씀합니다. 단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하나님의 계명과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조각과 타락한 제사장을 신뢰하며 라이스 정복에 나섰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레위인의 첩 사건이 있습니다. 한 레위인이 첩과 함께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에서 묵던 중, 성읍의 악인들이 그를 위협하자 첩을 대신 내어주었고, 그녀는 밤새 폭행당해 죽었습니다. 분노한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내며 기브아의 죄악을 알렸습니다. 열한 지파는 기브아의 범죄자들을 넘기라 요구했으나, 베냐민 지파는 이를 거부하고 범죄자들을 보호했습니다. 결국 내전이 벌어졌고, 치열한 전투 끝에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하여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의 문제의 원인이 되어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되어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소견대로 행동했던 사사 시대의 혼란과 타락을 끝판을 보여주며, 사사기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몰랐거나 단순히 성경 지식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심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누렸던 권위와 특권은 백성들의 예배를 돕고 대신해서 드리는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를 경멸하며 우습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타락의 모습은 예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싫어하고 경멸하며 하나님을 부정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배는 귀찮은 의식일 뿐,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배를 통해 얻는 물질적 이익과 음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이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인은 레위인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점을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을 겁탈한 것입니다. 아버지인 엘리가 이것을 백성들에게 모두 듣고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냐고, 당장 그치라고 꾸짖습니다. 사람끼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중재하여 주시겠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변호하여 주겠느냐며 타일러도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 역시도 문제입니다. 앞으로 그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앞서 한 행동에 대해서 용인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이 성결하지 못하고 간음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하여 엘리는 그 죗값을 묻지 않고 앞으로는 잘해라 이렇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따르면 엘리는 매우 늙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늙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늙은 것입니다. 영적 권위도 없기에 자식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후에 보면 엘리가 매우 비둔하고 눈이 어두웠다고 말합니다. 바로 영적으로 타락한 제사장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가 본이 되지 못하기에, 아들도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셔서 엘리를 책망합니다. 네가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로 너희들을 살지려 한다고 비난합니다. 이 경고는 마지막으로 30절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지난날 나는, 너의 집과 너의 조상의 집이 제사장 가문을 이루어 언제까지나 나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만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레위인은 언약 위에 언약을 더한 사람들입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늘 상기시키고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런 레위인 본인들이 언약을 무시하고 경멸하였으니 그 잘못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후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경고는 무시무시합니다. 다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 죽이고 한 명만 살려놓고 온갖 세상의 저주를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보기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경시한 사람들이 받는 치욕스러움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한편으로 두렵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도 취소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 레위인, 특히 엘리 집안에 내려오는 제사장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받는 징계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생각이 듭니다. 언약도 파기될 수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시작을 누가 한 것입니까? 바로 엘리와 엘리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경멸하고 무시했기에, 언약이 파기 직전 상황으로 몰린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지만,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서 마치 언약이 폐기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그 아들들의 잘못도 싫어하시만, 그 언약이 땅에 내쳐 버려져서 무시당하고 폐기되는 것을 볼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은 폐기하지 않으시고 남겨두시고, 대신 언약을 이을 다른 사람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겠다. 내가 그에게 자손을 주고, 그들이 언제나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왕 앞에서 제사장 일을 보게 하겠다.”

 

바로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오늘 본문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한나와 엘가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엘리 가문으로 입양되어서 제사장으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 가문, 즉 레위 지파와 맺은 언약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피로서, 즉 입양의 방식을 통해서 언약을 새롭게 이행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어렸을 때 세마포 에봇, 즉 제사장 의복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에봇은 격식이 몹시 까다로워 입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에봇은 우림과 둠림이라는 돌도 있고, 그 장식물로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들이 붙어 있기에 어린아이가 입기에는 몹시 무겁고 불편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이 입은 에봇은 대제사장의 화려한 에봇은 아닌 세마포 에봇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마포 에봇이라도 일상에 늘 입고 있었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이행할 자로서 책임감을 익혀 나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마포 에봇에는 단지 사무엘의 순종과 헌신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인 한나가 매년 제사를 위해 실로에 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지어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세마포 에봇을 한나가 손수 지어 보낸 것입니다. 한 땀 한 땀 손수 옷을 지어가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세마포 에봇은 한나의 기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간구하다는 뜻의 단어는 샤알שָׁאַל입니다. 한나는 불임으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께 아들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때 한나의 기도는 히브리어로 "샤알"로 표현됩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겠다고 서원하며, 자신의 기도가 단지 개인적인 욕망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녀의 간구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으며, 그녀는 그 아들을 사무엘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샤알,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였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어떻게 얻은 귀한 자식인데, 가능하면 오랫동안 늘 옆에 두고 싶을 터인데, 그럼에도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제사장 나실인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기적적인 은혜를 받았다면,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집착할 수 있는데, 간구하여 얻은 바를 하나님께 도로 받쳐 드리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이 말씀을 보고 한나에게 다른 자식을 많이 주셔서 한나가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헌신하니 더 큰 복을 주셨다고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21절에서 주님께서 돌보아주셨다는 파카드פָּקַד라는 단어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파카드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찾아오다, 기억하다, 돌보다는 뜻도 있고, 심판하다, 임명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기억하여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하시고, 적절한 권한을 주시고 지위를 임명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기억하시고 찾아오셔서 아들 이삭을 주시는 것도 파카드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이들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도 파카드이고, 이스라엘의 원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판하시는 것 역시 파카드인 것입니다.

 

바로 이 파카드 안에 레위인의 언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좋든 나쁘든 부정적인 심판이든 긍정적인 축복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 안에서 돌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에게 베푸신 파카드의 은혜가 사무엘에게 세마포 에봇으로 옷 입혀진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 파카드의 환경 속에서 여호와 함께 자라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에 밀착하여서, 하나님과 함께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어린 사무엘이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여호와 함께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면, 가달 임 여호와 גָּדַל עִם יְהוָה 이것이 바로 레위인의 언약에 충실한 자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가달 임 여호와, 즉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다를 라틴어로 한다면, 그 유명한 문구인 코람 데오 Coram Deo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름 아닌 양심입니다. 삶이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기에 내 모든 행동과 결정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 따르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앞서 엘리의 아들들의 문제는 이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있다는 것은 내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작동하여, 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앞서 주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에 따라 양심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존중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양심적으로 살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세워진 자들은 더욱 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땅히 가르칠 것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며, 참된 것을 참되다 말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양심에 화인 맞은 채 언약을 내팽개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죄악과 어둠과 다를 바 없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엘리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의 레위인들 거의 대부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심 없는 짐승처럼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말세에 있을 심판의 징조의 마지막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결국 그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결국 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선한 양심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한 양심과 같은 이, 사무엘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한나의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폐기된 것과 같아 보이던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는 것은 선한 양심인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 이 사람이야 말로 심판 가운데 구원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고, 이것은 창세기 1장의 "보기에 좋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피조물을 보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면서 보시기 좋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선한 양심이 창조와 생명의 근원적인 힘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자기 소견대로 사는 혼돈의 시대일수록 선한 양심을 가진 자를 찾으십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와 조국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을 듣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