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장 7-17절 새번역
7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8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9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10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11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
12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13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14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15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16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7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31장의 주제는 소망입니다. 소망은 확실한 보장이 있을 때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소망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약속이 있다면,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나아질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1장 후반부에서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새 언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옛 언약으로는 소망을 가질 수 없으니, 새 언약에 근거한 소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옛 언약은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옛 언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약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은 먼저 북이스라엘이, 이어서 남유다까지 차례로 멸망했습니다. 더는 옛 언약에 의존해 소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끌려가도 70년 후에 돌아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진 상황에서 누가 이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멸망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망했습니다. 이 시기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시드기야 통치 말년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약 140년이 지난 시점으로, 북이스라엘은 이미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일부 남은 자들이 주변 이방인과 혼인하며 명맥을 이어갔지만, 국가를 재건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으로,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의 땅 중 레위인에게 할당된 성읍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위 계승 다툼에서 아도니야를 지지하다가 솔로몬에게 쫓겨난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아비아달은 실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긴 엘리 제사장의 직계 후손이기도 합니다. 일부 견해에 따르면, 아나돗은 남유다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에서 망명한 제사장들이 거주한 곳으로, 예레미야도 북이스라엘 출신 제사장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설이 맞든,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주류 제사장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북이스라엘 출신이라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140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회복의 기미가 없던 상황에서 남유다가 70년 만에 회복된다는 예언은 그의 입장에서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떤 근거로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적인 증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심어줄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소망의 근거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먼저 7절을 보겠습니다.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땅은 다른 민족들로 채워졌고, 북이스라엘은 소수의 남은 자만이 이어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원하실 것이라 말합니다. 특히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도 포함된다고 선언합니다.
지난주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 가문에 내려진 저주를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2장 3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네 자손 가운데 하나만은 끊어 버리지 않고 살려 둘 터인데, 그가 제사장이 되어 나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되고, 희망을 다 잃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변사를 당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출신이 북이스라엘 제사장 난민이거나 엘리의 직계 후손인 아비아달의 후손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대표합니다. 엘리와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로 인해 옛 언약이 끊어졌지만, 예레미야는 이 저주가 끝나고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소망의 증거임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증거로 삼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마도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남유다가 망한 뒤 70년 후에 회복된다고 예레미야의 모습을 통해 믿으라는 말은 터무니없게 들렸을 겁니다.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제사장인 예레미야를 보고 차라리 회복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회의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리라 확신했던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서 잘나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는 이들은 눈멀고, 다리를 절고, 임신했거나 갓난아이를 돌보는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마찬가지로 아무 힘없는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기존에 그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무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둘씩 새로운 언약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로운 생명과 질서를 만들어가는 역설적이고 전복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모략은 그 어떤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15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여기서 먼저 라마는 높은 산지를 가리키는 말로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북이스라엘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합니다. 라헬의 무덤 부근으로 알려진 이곳은 그녀가 자식을 잃고 슬퍼한 장소로 상징됩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라헬이 자식들 때문에 울었던 이유를 깊이 주목합니다. 우선 라헬의 자식은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이스라엘의 주요 지파였고, 베냐민은 남유다에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라헬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의 어머니로 상징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지만, 라헬의 눈물은 두 나라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남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 집결했던 장소가 바로 라마였습니다. 게다가 라헬의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집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사건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계기가 되었고, 베냐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모멘텀이 되었습니다. 라헬의 울음은 민족 전체의 아픔과 상실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회복 약속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라헬의 통곡을 이미 망한 북이스라엘의 슬픔이 아니라 앞으로 망할 남유다의 슬픔과 함께 연결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함께 동시에 이루어질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평화와 민족 통합의 메시지를 통해 소망을 역설합니다. 이러한 예언은 예레미야의 영적 통찰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역사에서 성취되었는가입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예언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70여 년 후 끝났지만, 유다의 운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예수님의 시대 이후 디아스포라로 이천 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온전한 회복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유대 역사의 한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서도 이상적인 평화와 번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사람들은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다툽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멸망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 기대했지만,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 이전과 같은 패권 싸움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 로마, 그리고 그 이후의 제국들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는 반복이 지속됩니다. 지금까지 괴롭히던 원수가 떠나면 더 강한 적이 나타나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소망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꿈이 이루어질 조짐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선포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망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나 예언자들도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에 담긴 근본적인 진리,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흩어진 자들을 모으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정확히 선포했습니다. 11절 말씀에서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자를 이 세상의 가장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다만, 예레미야나 우리 모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과 때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신약의 시대를 맞이한 초대교회는 새 언약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구원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한 걸음씩 서서히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강한 자들, 부한 자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버려진 자들, 맹인들, 다리 저는 자들, 고아와 과부들을 중심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 강력한 소망의 근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막연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단지 십자가에 참여하라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이 안일한 개인적 복만을 추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분량과 능력만큼 감당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에 몰두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복만을 추구하거나 사회 개혁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 진리의 비밀을 깨우치는 것이 기독 신앙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개인의 삶에서 무엇을 하든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깊이만큼 삶의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하면 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시 처한 민족의 위기, 사회적인 문제, 개인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집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앞서 읽은 서신서 말씀인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신 가장 중요한 비밀은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라헬의 통곡도 이 비밀의 한 부분인 것이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일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비밀이 담긴 옛 언약도 결국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제국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비극적 운명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중 가장 밑바닥에서 힘이 없던 남겨진 자들, 흩어진 자들을 중심으로 새 언약에 새로운 비밀을 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처했던,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마주했던 모든 모순과 한계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 신앙의 이유이자 출발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될지 말하진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의 서두의 몇 구절을 살펴보면, 단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부어질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소망의 이유가 되길 축복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가며 마지막 날에 완전히 성취되는 진리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기쁨을 오늘 본문 12절부터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