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5장 1-9절 새번역
1 군대의 도성아, 군대를 모아라! 우리가 포위되었다! 침략군들이 몽둥이로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뺨을 칠 것이다.
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4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일곱 목자, 여덟 장군들을 보내서, 침략자들과 싸우게 할 것이다.
6 그들은 칼로 앗시리아 땅을 정복하고, 뺀 칼로 니므롯 땅을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앗시리아의 군대가 우리의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국경선 너머로 들어올 때에 그가 우리를 앗시리아 군대의 손에서 구원하여 낼 것이다.
7 많은 민족들 사이에 살아 남은 야곱 백성은,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아침 이슬과 같이 될 것이며, 푸성귀 위에 내리는 비와도 같게 되어서,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생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8 살아 남은 야곱 백성은 여러 민족과 백성 사이에 흩어져서 살 것이며, 숲 속 짐승들 가운데 서 있는 사자처럼, 양 떼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자처럼, 걸을 때마다, 먹이에게 달려들어 밟고 찢을 것이니, 그에게서는 아무도 그 짐승을 건져 낼 수 없을 것이다.
9 네가 네 대적 위에 손을 들고 네 원수를 모두 파멸시키기를 바란다.
미가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이사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로 북이스라엘과 수도인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로 조상대에 남유다로 망명을 한 듯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다시 북이스라엘로 넘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미가가 북이스라엘 왕들을 계속 비판하니깐, 당시 베가라는 왕에 의해서 절벽에서 떠밀려 죽게 했다고 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군대의 도성아, 군대를 모아라! 우리가 포위되었다! 침략군들이 몽둥이로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뺨을 칠 것이다.” 군대의 도성이라 번역한 부분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딸군대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이 바로 딸군대, 군대의 도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성읍의 경우를 보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 주변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히브리어로 이르יער라고 하고, 그 주변의 마을들, 즉 성벽 바깥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마을들을 크파르כפר라고 불렀습니다. 성벽도시 이르가 모체가 되어서 주변 마을인 크파르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묶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 같습니다. 중앙의 성벽 도시는 마더 시티라고 불렸는데, 어머니로서 주변에 늘어선 시골마을들, 즉 딸들을 돌보는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앙의 성벽 도시인 마더 시티에는 전체 주민 중 소수인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만 살았습니다.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마더 시티의 딸들로 불리는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평상시에 마더 시티에 세금을 내고 전쟁이 일어나면 성 안으로 들어가 마더 시티의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 마더 시티가 보호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 밖에 사는 가난한 대다수가 징집병이 되어서 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마더 시티가 그 주변 딸 마을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착취하는 구조인 것입니다. 앞서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착취와 억압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착취의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앗수르라는 이방 세력을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의 뺨을 때리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갑작스럽게 새로운 메시지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도 인용되었던 유명한 구절입니다.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미가서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다윗 혈통을 이어갈 새로운 왕이 탄생할 곳으로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선택된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선택된 이유는 예루살렘 근처의 여러 작은 마을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단순히 ‘베들레헴’이라고 하지 않고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표현합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풍성한 열매’라는 뜻을 지닙니다. 또한, ‘베들레헴’은 ‘떡집’을 의미하는데, 에브라다가 곡창지대로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지역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떡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에브라다는 슬픔의 지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은 곳으로, 라헬의 통곡이 이 지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라헬만의 통곡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통곡입니다. 예루살렘 딸 마을로서 권력자들에게 많은 수탈을 당했고, 전란이 있을 때마다, 젊은 남자들이 병사로 끌려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슬픔이 있는 곳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상실한 절망의 땅, 슬픔과 죽음의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져 마치 거대한 무덤과 같던 그곳에서 메시아의 희망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여기서 맡겨 두실 것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은 그냥 방치해 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그냥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미가 시대만 하더라도 정말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고, 그리고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남유다 예루살렘도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치하시고 내버려 두실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유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야지만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여인을 잘 돌본다고 해서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방치하고 있어야지만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신앙의 역설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난이 심할수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이 해산하는 때이기에, 하나님의 방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좀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지혜자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지요. “하나님 당신의 뜻이라면 내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구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렇다고 이 세상을 대충 아무렇게나 살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이라면, 해산할 때까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가지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앞서 지혜자의 기도처럼,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구하라 주실 것이고, 찾으라 찾을 것이고 두드려라 열릴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미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간절한 염원과 기도의 공로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향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서구도자적인 삶을 살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임신한 여인이 어떤 생명이 탄생할지 모르지만, 내가 견뎌야 할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는 담대한 용기로서의 믿음인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산하여 여인이 낳은 아이가 목자가 되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표현은 서서 그 떼를 먹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주로 앉아서 재판합니다. 자기가 편한 대로 유리한대로 판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 있는 자는 자기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 노심초사하며 부지런히 수고하며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 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간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행전 7장을 보시면 스테반은 죽기 직전에 하늘이 열리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주님께서 곁에 서서 힘을 주심으로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일곱 목자, 여덟 장군들을 보내서, 침략자들과 싸우게 할 것이다.” 여기서 메시아와 함께 싸우는 일곱 목자와 여덟 장군이 나옵니다. 일곱 목자가 누구이며, 여덟 장군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추측하기는 ‘7’은 완전수를 뜻하기에 ‘일곱 목자’는 ‘많은 목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8’은 일곱에다가 하나를 더한 것이기 때문에 7을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덟 장군’도 ‘많은 수의 장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싸울 용사들을 충분히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한자성어에서도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번 넘어져도, 굴하지 아니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의 용장들을 많이 준비하셔서 이끌어가시고, 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화라는 것이 그냥 있는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가운데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이 그렇습니다. 계속 믿음의 싸움이 진행될 때, 승승장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또다시 일어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얍복 강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할 때, 그 씨름에서 이겼겠습니까? 매번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샅바를 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 샅바를 붙잡고 있으면서, 넘어지면 또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자 해가 뜰 때가 되어 하나님이 떠나시려고 할 때에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허벅지 뼈를 쳐서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결코 놓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일어나지 못해도 심지어 그렇게 죽더라도 샅바를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고,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야곱과 같은 이들이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민족들 사이에 살아남은 야곱 백성은,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아침 이슬과 같이 될 것이며, 푸성귀 위에 내리는 비 와도 같게 되어서,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생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야곱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면 새벽이슬을 맞음과 같이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풀 밭에 내리는 새벽 이슬을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풀 밭에 내리는 소나기와 이슬처럼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7절에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갈 뿐, 더 이상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용감하고 맹렬한 장수임이 분명합니다. 8절을 보시면, 이 사람을 숲과 양 떼 가운데 서 있는 사자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을 기다리고 의지하는 사람,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그 샅바를 결코 놓지 않는 자가 사자와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마지막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살아남은 야곱 백성은 여러 민족과 백성 사이에 흩어져서 살 것이며, 숲 속 짐승들 가운데 서 있는 사자처럼, 양 떼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자처럼, 걸을 때마다, 먹이에게 달려들어 밟고 찢을 것이니, 그에게서는 아무도 그 짐승을 건져 낼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네 대적 위에 손을 들고 네 원수를 모두 파멸시키기를 바란다.” 살아 남은 야곱 백성은 여러 민족과 백성 사이에 흩어져 살 것이라 했습니다. 회복이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과 백성들에게로 흩어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더 시티에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자들이 아닌 당당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각자의 소명을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흩어진 가운데서 한 명이 천 명 만 명의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될 자로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 끝까지 의지하며 남은 자들을 젊은 사자와 같이 강하게 만드셔서, 홀로 떨어져 흩어져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별과 같은 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사자의 역할은 마지막 때에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기다리는 자들, 그리고 사람에 기대어 세상 권세와 부에 취해 있던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은 이슬과 단비와 같은 이들, 그리고 마치 젊은 사자와도 같은 이들을 준비시켜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미가서 5장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의지하며 믿음의 싸움을 이어가라고 도전합니다. 고난의 시기에는 때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듯, 하나님은 이러한 방치의 시간조차 그의 계획 안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야곱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붙들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끈기와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본문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남은 자들을 새벽이슬처럼 소생시키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생명의 단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일곱 목자이자 여덟 장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곱 목자와 여덟 장군처럼 준비시키셔서 그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목자는 새벽 이슬 가운데 강건해지고, 장군은 짐승들과의 전투에서 용맹함이 더해집니다. 이 믿음은 평화를 기대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삶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고난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그 침묵의 시간 안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으며 인내하십시오. 사람이나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벽이슬과 같고, 때로는 젊은 사자와 같이 강건한 믿음의 사람들로 우리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