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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스바냐 3장 14절-20절 죽을 때 죽어야 기뻐하고 반기신다

by 알렉스강 2024. 12. 14.

스바냐 3장 14절-20절 새번역

 

14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16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17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18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19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20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스바냐의 배경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암울한 때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패망한 이후 100년이 지난 시점으로 보입니다. 남유다는 히스기야의 개혁 운동이 있었지만, 므낫세 아몬과 같은 악한 왕들로 인해서 개혁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왕들의 잘못된 통치로 말미암아 국가의 근간은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나라 전역에는 우상숭배가 횡행했고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 겨우 8살의 어린 요시야가 불안하게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앗시리아가 쇠퇴하면서 신흥제국인 바벨론이 강성하게 일어서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적인 온갖 불안요소로 크나큰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예언자 스바냐는 따뜻한 위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스바냐는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핵심 주제가 주님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기대와 희망마저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잔인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냉혹한 스바냐의 예언이 스바냐서 전체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 전혀 다른 어조로 그 선언이 변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심판의 경고 중 뜬금없는 희망의 메시지

14절입니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이렇게 갑작스러운 어조의 변화는 우리를 낯설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남유다와 예루살렘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주민들의 현재와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코앞에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 스바냐의 예언이 있고 난 이후 남유다 예루살렘은 얼마가지 못해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도 이런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는 희망이 없고, 이제는 망할 일만 남았음에도, 스바냐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미친 것이 아니냐, 헛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스바냐가 기뻐하고 노래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근거는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모든 순간이 결국은 지나간다는, 이른바 새옹지마의 교훈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확실하다면 어두운 현실을 버텨낼 수 있고, 더 나가서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모든 심판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극히 일부는 그럴 수 있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희망이 있어야 사람이 뭔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그게 정말 기다릴만한 일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노래하고 기뻐하는 건 정신적으로 이상한 겁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

스바냐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암담한 상황을 해결해 주시는 그날과 그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15절 말씀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스바냐는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유심히 들어야 합니다. 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있더라도 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를 하나님과 함께 통과해 보니, 이제는 화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를 17절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 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절망과 불안 속에 신음하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서 그 어떤 심판이나 화가 내게 오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기포르 요쉬아גִּבּוֹר יְשׁוּעָה라는 말은, 구원의 용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구원의 용사로 오셔서,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든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살리신다는 말입니다.

 

누가 용사인가?

일반적으로 용사를 떠올리면, 강력한 전사나 영웅이 나타나서 국난에 처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용사라 불리던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던지, 아니면 평균 이하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일개 어린 목동이었고, 기드온은 두려움으로 밤중 몰래 포도주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죽으면 죽겠다는 마음이고,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섭리주 하나님, 모든 것을 이루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자 위탁인 것입니다. 

 

구원의 용사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을지라도 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하나님 말씀은 심판이 없고 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과 화로 인해서 망하게 되고 죽음을 순순히 받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슬픔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망하고 죽어야 할 때에, 안 죽으려고 버티거나 망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자기 욕심으로 행동하면 이로 인해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는 것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이것이 자신에게 명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입니다.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이어서 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때에 일어날 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앞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사가 왕족이나 귀족, 힘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매우 평범하거나 오히려 평균 이하의 용기와 힘을 가진 사람이라 했습니다. 심판과 징계의 시간이었던 주님의 날이 끝난 이후, 하나님이 불러 모으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괜찮거나 멀쩡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없어진 자들, 흩어진 이들, 부끄러움을 받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스바냐는 야훼께서 숨기셨다, 야훼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숨기시고 누구를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앞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인 남은 자들입니다.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면서 세상의 요구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망하고 죽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기꺼이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증손입니다. 혈통으로 볼 때 왕족으로 대단한 집안이었습니다. 이런 신분에도 불구하고 스바냐는 왕이 듣기 좋아하는 예언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주님의 날,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동시대 예언자인 예레미야처럼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망한다, 예루살렘 시온이 망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알린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심판하심으로 구원하시며, 떠나심으로 함께하신다

이처럼 스바냐와 같이 죽는다, 망한다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묵묵히 받는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날이 오면 하나님이 너를 보니 기쁘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으며,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의 역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심으로 구원하시며, 떠나심으로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날을 선언하시고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결국 남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한 처참한 살육과 파괴를 겪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고 외면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 가혹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참혹한 나무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가혹한 심판과 버림받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받기에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왜 그렇게 하셨냐고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남은 자로서 우리가 죽음과 심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처절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 왜 그러셨나요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러한 처절한 질문이 있었기에, 십자가에서 심판과 죽음의 잔을 받아 마시고 나신 후 부활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활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음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구원의 참된 증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현실에 마주한 심판 앞에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위기를 피할 수 없으며 각자 실존의 자리에서 심판을 겪습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라가 위기와 심판에 처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 일어난 사건은 스가랴가 경고한 하나님의 심판과 주님의 날에 비견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사건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 각자 자신이 어떤 생각과 자세를 가져야 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무작정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와달라고 탄식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은 어차피 요지경이라며 정치인 모두를 도매금하면서 방관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흠 없고 죄 없는 자가 누구냐,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양심적인 이들은 내 탓이라 말하며 내 안의 탐욕과 폭력성을 본다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이념적 좌표를 설정하여서 누가 좌파이고 우파인가 하며 적대적인 비방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올해 떠들썩한 대규모의 신앙집회가 있었고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인 서울로잔대회와 선언문, 여러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회복을 위한 광화문 200만 기도 집회, 그리고 늘 예전처럼 해오던 국가조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 목사님들이 참여하여 행사를 진행하면서, 이런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면 우리 사회와 교회에 대대적인 혁신과 부흥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광명이 비치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결과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내란으로 나라가 시궁창으로 쳐박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부정선거라는 이유로 내란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심에 소위 태극기 부대라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 임한 심판을 바라보는 교회의 자세

이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주님의 날을 전한 스바냐의 예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여기서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죽어야 합니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 국가 헌법을 유린한 것에 대해서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상황을 면피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심판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을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겁박하고 국회를 마비시켜 민주공화제를 멈추어 독재정치로 나아가려고 한 이들에 대해서 엄한 처벌을 내려서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도록 역사의 본보기로 삼는데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 제도 하에 법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탄핵과 이후 정치적인 전개 상황,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각자 생각이 있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형태와 결과가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알아서 행하십니다. 누구에게 유리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끌어가시는 섭리주 하나님의 이끄심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 받아야 할 심판이 있으면 받고, 그리고 교회도 당연히 이 심판의 예외가 될 수 없고 마땅히 받을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날 죽어야 할 때를 알고 죽는 자들에게 부활이 있습니다. 스바냐의 고백처럼,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이 불러 모으시는 남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