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 1-4절 새번역
1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3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4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말라기는 기원전 450년경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던 시기였으며,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이들이 형식적인 제사 의식과 정치 개혁을 시도했던 때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개혁도 잠시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반복했고, 영적으로도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력자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온갖 부패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말라기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환기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오용하며 백성들을 죄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신다고 비꼽니다. 이에 대한 말라기의 대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여기서 특사란 히브리어로 말라키מַלְאָכִי입니다. 바로 말라기 선지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말라기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 자체가 고스란히 보냄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은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저 보낸 이의 말을 전할 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을 전하는가 하면,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라는 질문에 말라기는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특사는 은과 금을 깨끗하게 정련하는 정련공처럼,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레위 자손이 하나님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특사이며, 누가 레위 자손인가?
그럼 누가 특사이며, 누가 레위 자손이란 말입니까? ‘레위 자손’이 의미하는 바는 레위지파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레위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숫자가 작습니다. 이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마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레위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는 구약에서 기록된 말씀 중 시기적으로는 가장 마지막 상황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끌고 왔던 제사장 그룹이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들 역시 이전 제사장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똑같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하나님의 사자이며, 레위인인가 했을 때, 혈통적으로는 레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이제는 레위인들이 희석이 되어서 찾을 수 없고, 말씀을 맡은 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세례입니다. 언약의 사자가 오시기 전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내 사자’를 먼저 보내신다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내 사자’를 세례요한이고 ‘언약의 사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특징이자, 예수님과의 연결점은 무엇보다도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종교적 의식이나 신고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자 생각과 가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세례에서 핵심은 회개라고 하지요. 세례에서의 회개는 잘못된 행실을 뉘우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회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는 하나님 형상으로 닮은 자,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물의 세례 불의 세례로 나누지요. 물의 세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합니다. 사실 이 모습을 그려주는 말씀이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긴 말씀이지만 야고보서 3장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3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14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15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
지혜에도 두 가지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땅에 속한 악마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롭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하고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양분이 되어서 정의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악마의 지혜는 반대의 것이지요. 이 지혜의 특징을 야고보서에서는 농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농부는 지혜가 많다고 하지요. 농부의 지혜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수답이라고 하지요. 저수지나 지하수 펌프 등의 관개 시설이 없어, 물을 오로지 빗물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시험을 다 겪는 것입니다. 바람 불고 태양이 내리더라도 참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면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농부의 모습은 얼굴이 햇빛에 구릿 빛깔처럼 그슬러서 몸은 고된 노동으로 단단해진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기서 먼저 4절에서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란 것은 원어로 말하면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 홀로클레로스ὁλόκληρος를 번역한 것입니다. 온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 않고 잘익은 열매처럼 여물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이 참된 세례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로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모습이 무엇이냐면, 야고보서 전체로 볼 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의 세 가지 특징
첫째, 빈부의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에 빠져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에 빠지는 것이 돈입니다. 생존에 바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상을 추구하다보면, 현실에 문제가 생기고, 현실을 추구하다보면 땅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균형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농부를 생각해보십시오. 먹고 사는 현실을 위해서 손과 발을 쉬지않고 성실하게 사용합니다. 대신 눈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 점을 1장 9절과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내가 비천하게 사는 것, 부자로 사는 것 모두 다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농부는 농사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늘에 맡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기 욕심에 빠져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먹고 사는 문제를 좀 더 넓게 본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야 개인 한 사람에게 국한될 수 있으나, 자기 욕심은 좀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도 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도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시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욕심을 낸 것도 아닌데,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고통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 정확하게 말하면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련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준비하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사람의 됨됨이와 진실함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는 사탄이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욕심을 통해서 역사해서 유혹하고 미혹하여 우리를 지옥의 백성으로 만들고, 멸망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시험이야 마땅히 받아야 하겠지만, 두 번째 시험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성정, 즉 육에 속한 기질과 감정을 잘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경건입니다. 경건을 종교적 열정이나 형식적인 틀을 잘 갖추어내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경건을 이렇게 말하지요. 1장 26절과 27절입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보고는 경건을 혀를 잘 통제하라는 것으로 이야기한 듯 보입니다. 물론 말조심하라는 권면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혀를 다스린다고 했을 때, 다스리다는 그리스어 단어 칼리나고 게오καλινάγω γεω는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에 재갈을 물려 그 말을 통제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은 말을 잘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재갈을 물려 이끌고 가실 때 순순히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농부가 자신이 소가 되어서 스스로 재갈을 물려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 땀을 흘리며 묵묵히 일을 해나가면, 그가 갈고 있는 땅만이 경작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불의가 난무하고 죄악이 가득했던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에, 누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가, 누가 레위 사람인가 묻는 질문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질문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정치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겠지만, 그리스도인이자 목사의 양심으로서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우리나라는 너무나 큰 역사적 비극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근간인 헌법이 흔들리는 위기에 쳐한 것입니다. 헌법을 수호할 대통령이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불법 계엄을 통한 내란으로 독재 정권을 획책하려는 시도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더 큰 비극으로 넘어갈 수 있었으나 다행히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전히 불안한 채 서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한 행동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약속인 헌법을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사소한 약속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국가의 근본적 약속인 헌법을 깨뜨리는 것은 짐승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 행위의 목적도 더 큰 권력을 누리고자 함입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했습니다. 바로 이 땅의 지혜, 악마가 주는 지혜입니다. 시기심과 경쟁심, 온갖 거짓과 악함으로 이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행동이고, 이를 주도한 윤석열 대통령이 악한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 오랫동안 보수적인 정치관으로 국민의 힘 지지자들이 다수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악한 자의 행실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교회가 마땅히 이야기해야 할 바입니다. 그리고 각자 양심의 자유대로 우리 법에서 규정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금 정치 상황에서 한 국민으로 마땅히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렇게 어둡고 위급한 시대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라기 시대의 불의한 자들이 큰소리치며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더 좋아하신다고 비꼬는 그들을 향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일수록, 우리는 심지어 미련하듯 보일 수도 있을 성실한 농부처럼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법을 어기고 날 뛰어도, 우리는 끝까지 법을 지키며, 우리 소명을 지키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내주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묵묵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여,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아도 톡 지탱하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