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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요엘서 1장 1절-14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by 알렉스강 2024. 11. 30.

https://www.youtube.com/watch?v=jfgOd3RM4Cw&t=1493s

 

 

요엘서 1장 1절-14절 새번역

1 이것은 주님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2 나이 많은 사람들아, 들어라! 유다 땅에 사는 사람들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살고 있는 지금이나 너희 조상이 살던 지난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3 너희는 이것을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녀들은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게 하고, 그들은 또 그 다음 세대에 말하게 하여라.

4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갉아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말끔히 먹어 버렸다.

5 술을 즐기는 자들아, 깨어나서 울어라. 포도주를 좋아하는 자들아, 모두 다 통곡하여라. 포도 농사가 망하였으니, 새 술을 만들 포도가 없다.

6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군대가 우리의 땅을 공격하였다. 그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날카롭기가 암사자의 송곳니와 같다.

7 그들이 우리의 포도나무를 망쳐 놓았고, 우리의 무화과나무도 그루터기만 남겨 놓았다. 나무 껍질을 다 벗겨서 그 줄기가 모두 하얗게 말랐다.

8 백성아, 울어라! 약혼자를 잃고 슬퍼하는 처녀처럼, 굵은 베 옷을 걸치고 울어라.

9 성전에 날마다 바치는 곡식제물도 동나고 부어 드리는 제물도 떨어지니, 주님을 모시는 제사장들이 탄식한다.

10 밭이 황폐하구나. 곡식이 다 죽고, 포도송이가 말라 쪼그라들고, 올리브 열매가 말라 비틀어지니, 땅이 통곡하는구나.

11 농부들아, 슬퍼하여라. 포도원 일꾼들아, 통곡하여라. 밀과 보리가 다 죽고, 밭 곡식이 모두 죽었다.

12 포도나무가 마르고, 무화과나무도 시들었다. 석류나무, 종려나무, 사과나무 할 것 없이, 밭에 있는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 백성의 기쁨이 모두 사라졌다.

13 제사장들아, 굵은 베 옷을 입고 슬피 울어라. 제단 앞에서 섬기는 자들아, 통곡하여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아, 굵은 베 옷을 입고 성전으로 가서, 밤을 새워 통곡하여라. 너희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곡식제물과 부어 드릴 제물이 떨어졌다.

14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라. 장로들과 유다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을 불러 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모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요엘의 이름과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

요엘 선지자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이라고 하는데, 이 엘은 가나안 종교에서 사용된 보편적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엘을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이스라엘 신앙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이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부터 섬기던 신은 아니었습니다. 하란은 달신을 섬기던 지역으로, 달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력을 숭배하며 초승달 모양과 닮은 소를 신성시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후 달신을 버리고, 가나안의 토착 신들 중 가장 높은 지위의 신인 엘을 섬기게 됩니다. 이러한 흔적은 성경의 주요 어휘와 인명에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이쉬마 하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셨다”(예하제크 하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야쑤르 엘에서 파생된 이 이름은 “엘의 주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모든 권한이 엘에게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히브리 사람들은 가나안의 다른 신들은 거부하고 엘만을 유일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가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와 그 기원

가나안의 잡신들 중 아버지 신격인 엘을 선택하여 유일신으로 섬긴 히브리 민족의 신앙 형성은 출애굽과 관련하여 모세와 레위 지파의 역할을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 출신으로, 레위 지파의 기원을 이해하면 이스라엘 신앙의 변화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아들로, 형 시므온과 함께 세겜 사람들에게 디나 사건의 복수를 하여 흩어져 살게 됩니다. 창세기 49장 5절에서 야곱은 레위와 시므온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이 구절은 단순히 세겜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레위 지파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최근 구약 연구에 따르면, 레위인은 본래 이집트에 거주하던 특정 계층이었다고 봅니다. 이들은 농업이나 유목을 하던 다른 이민족과는 달리, 이집트 지배층의 고용된 용병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아피루(Apiru) 또는 하비루(Habiru)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의 왕족과 귀족을 위해 잡일을 하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 역할을 맡았습니다. 문자를 알았던 이들은 이후에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하급 관료나 신전을 보조하던 하급 제사장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자로 인한 자연에 대한 이해의 변화

그런데 이들이 농사나 가축을 키우는 밑바닥 하층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기에, 애굽 지배층들과 교류하면서 문자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역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갑자기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이 남겨져 있다면, 이와 비슷한 일이 언제 있었고 이 일로 인한 결과가 어떠했으며, 또한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기록을 읽은 사람은 지금 닥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대응하거나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가 있고 없고는 차이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 문자가 없다면, 지금 자신에게 닥쳐온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대해서 대응할 수 없습니다. 자연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문자를 모르는 고대인들은 자연을 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문자를 통해서 자신에게 닥친 자연재해의 문제를 해석한 사람들은 자연과 신을 떨어뜨려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이집트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문자의 시작을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로 보지만,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그리고 대다수의 문자의 기원을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집트 사람들이 자연과 신을 분리시키기 시작했지만, 결국 자연으로 분리시킨 신을 애굽의 지배층 중 최고 권력자인 왕과 동일화시킨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지배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용해 지배의 정당성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이 모세를 지도자로 삼은 레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을 보이는 어떤 것으로 나타내려는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은 왕이 죽으면 그 무덤을 피라미드로 크게 만들어서 과시했다면, 모세의 경우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면서, 죽은 뒤 무덤을 남기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대신 신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연이 아닌 문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과 율법을 남긴 것입니다.

 

광야 미디안 사람들과 하란 난민들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서 하겠습니다. 레위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탈출을 하는데, 광야를 지나면서 미디안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사람 이드로라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원래 가나안에 거하던 자들로, 그 안에서 경쟁에 밀려 광야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가나안 토착민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반감을 어떻게 표시했냐 하면 가나안의 여러 잡신들의 신상을 가져다가 얼굴 부위를 날려버리거나 파내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모세와 레위인들의 생각과 잘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던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인들과 미디안 사람 일부가 합쳐져서 가나안으로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누구와 함께 했냐 하면 앞서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하란 출신 난민들입니다. 많은 고대 사학자들이 주전 12세기 경 세계사적인 대혼란이 있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소아시아 터키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당시 청동기 문명을 지닌 헷족속이 세운 나라가 망하여서 사람들이 주변으로 흩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기후 변화로 인해서 농업 생산 감소로 인한 기근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인해서 고통받는 여러 지역을 이야기하지요. 그중에 최근 올리브, 오렌지 가격이 많이 올랐는데, 그리스나 터키, 그리고 스페인 지역이 건조하고 기온이 너무 많이 상승한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한 기후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봅니다. 

 

이들이 주변지역으로 흩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남쪽에 위치한 하란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레바논 시리아 지역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정착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헷족속이 강한 청동기 무기로 공격을 해오니깐 자기가 살던 정착했던 땅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변동의 시기 가운데 더 아래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곳이라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쉽게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죽기 전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막벨라 굴만 은 사백세겔에 구입했다고 하지요. 이를 통해서 볼 때, 하란 난민들이 주로 어디에 거주했나 하면, 농사짓고 살기 좋은 평지는 살지 못하고 사람이 살지 않던 산지로 올라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산업화로 급성장하던 과거 도시 달동네 판자촌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들은 산지의 좋지 않은 땅이라도 거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들과 합하여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산지이다 보니 협소하기에 한 곳에만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전역에 흩어져 있던 있던 하란 난민촌 산지로 들어가서 모세의 율법으로 문자를 가르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들이 문자를 가르치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유일신론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많은 신들 중 아버지 격인 엘만이 신이라고 여겼고, 이 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의 다른 신들은 거부하고 엘만을 유일신으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기원에 내재된 불확정성과 유일신론

앞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스라엘 기원을 이룬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하란 난민들, 둘째, 모세를 중심으로 한 레위인들, 셋째, 가나안에서 쫓겨나 광야로 이주한 미디안 족속인 유목민들입니다. 이 세 그룹은 기원이 다르지만, 놀랍게도 싸움이나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그룹 모두 불확정적인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야 했고, 때로는 억압과 부당한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들 모두의 삶은 불확실성과 불행으로 내몰렸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서로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불확정성입니다. 이는 구약의 유일신 사상이 등장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유일신론과 다신론을 비교해 보면, 다신론에서는 각 신이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그 특징에 따라 특정한 역할만을 수행합니다. 예를 들어, 악의 신은 어둠과 고통을, 선의 신은 평안과 빛을 줍니다. 그러나 유일신론에서는 한 신이 선과 악, 빛과 어둠, 평안과 고통을 모두 다스립니다. 즉, 유일신은 고정된 역할이 없고, 불확정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유일신론을 고정된 신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유일신은 어떤 것으로도 확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이사야 45장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리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평안과 환란을 모두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장은 바벨론의 강력함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페르시아 고레스왕에 의해 정복되는 사건을 목격한 제2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고정된 것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모든 일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우리는 그 섭리를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닌 불확정성이라는 뿌리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생물학적·역사적 DNA에는 불확정성이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천 년 넘게 나라 없이 떠돌았음에도 유대인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학대와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종 청소를 겪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 때부터 불확정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문자를 통해 역사를 알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재앙이나 전쟁, 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들조차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결국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안정적인 상황에서 오는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정성 가운데서 오는 믿음입니다. 역설적으로, 상황이 불확정적일수록 더욱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20세기 과학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히는 양자역학은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있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수록 운동량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히 알수록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집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불확정성이 오히려 미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개별 요소가 불확정적일수록 전체적인 패턴은 더욱 명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 내 개별 노이즈가 서로 상쇄되면 전체적으로는 안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별 요소가 지나치게 안정적이면 시스템 전체는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 원리는 영적으로도 적용됩니다. 현재의 불확정성이 커질수록 미래를 예측할 능력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용병으로 살아가며 끊임없이 불확정성 속에서 두려움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두려움을 직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키웠습니다. 레위인들이 처음에는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제사장의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에봇에 우림과 둠밈을 넣어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점쳐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점술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미래를 해석하려는 행위였습니다.

 

메뚜기 재앙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요엘서에 등장하는 자연재해는 메뚜기 재앙입니다. 메뚜기 떼가 모든 것을 갉아먹어 황폐하게 만든 상황을 기록하며, 요엘은 이를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아, 들어라! 유다 땅에 사는 사람들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살고 있는 지금이나 너희 조상이 살던 지난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너희는 이것을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녀들은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게 하고, 그들은 또 그다음 세대에 말하게 하여라.”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자를 통해 역사를 알고, 그 지식을 통해 현재의 재앙을 해석하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를 괴롭히는 메뚜기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남긴 성경을 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열재앙 중 하나의 재앙일 뿐이며, 그 재앙을 일으키시고 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제사장들아, 굵은 베 옷을 입고 슬피 울어라. 제단 앞에서 섬기는 자 들아, 통곡하여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아, 굵은 베 옷을 입고 성전으로 가서, 밤을 새워 통곡하여라. 너희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곡식제물과 부어 드릴 제물이 떨어졌다.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라. 장로들과 유다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을 불러 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모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단순히 자연재해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단순히 “심판을 받았으니 회개하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 하나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자연재해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지만, 자연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재앙 속에서 배워야 할 것
많은 사람들은 종말이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막연한 두려움에 빠지거나 불확정적인 상황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달하려는 본 뜻은 다릅니다. 요엘서가 가르치는 것은,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주저앉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불확정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를 돌아보고 내 삶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앙을 견디라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성경을 통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의나 자연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 어떤 형상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재앙이 찾아왔다면,  단순히 안정만을 추구하며 움츠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매 순간 치밀하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 행동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날, 인간과 역사, 자연법칙을 초월하시는 섭리주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메뚜기 떼로 인해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향해 요엘이 자신의 이름으로 고백한 믿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선언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