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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24장 36절-49절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by 알렉스강 2024. 4. 13.

https://www.youtube.com/watch?v=1h1clTp07HM&t=3s

 

 

누가복음 24장 36-49절 새번역

36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37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42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43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Jacques-Joseph Tissot, 「Meal of Our Lord and the Apostles」

 

제자들에게 부활한 육신의 몸으로 나타나시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후 예루살렘에 머물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엠마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엠마오에서 급하게 돌아온 두 사람이 제자들에게 자기들에게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보이시며, 육체로서 살과 뼈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구운 생선을 드셨습니다. 비린내가 나는 생선 비늘이 손과 입에 묻고, 그리고 입 안으로 서서히 살이 씹혀 삼켜졌습니다. 제자들은 이 장면을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육신이 다시 육신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과학적으로는 불가하지요. 예수님의 영이 죽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부활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하지만, 그래도 나름 설명이 됩니다. 어차피 영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영이 살아난 것이라 하면 납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기독 신앙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주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Corinth Ruins, following along the Footsteps of Paul.

 

고린도교회의 문제

육신의 부활의 문제는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고민거리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직접적으로 육신의 부활의 문제로 생긴 교회의 어려움을 거론하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우선 고린도 교회는 분파 문제가 심각했지요. 각 분파마다 교리에 차이가 있었는데, 부활에 대해서도 제각기 해석을 달리했습니다. 물론 모두 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에 대해서는 믿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선한 반면에 육체적인 것은 악하다는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강하게 영향을 주었기에, 자신의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지요. 대표적인 철학자 플라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육신은 죽더라도 영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형을 앞두고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 후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지속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은 어짜피 죽지 않는 것이기에 굳이 부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부활하신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고결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육신의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육신에 집착하는 것으로 여겨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보다 불멸하는 영혼의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썩어져 버리는 시체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에 대해 혐오스럽다 여기며, 심지어 자신들의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썩 반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개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집중했습니다.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 각자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 것과도 같습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바울은 이런 생각에 갇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부활을 좀 넓은 차원으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에 따르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지 못한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개인만의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15장 20절부터 22절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로서 드려졌고, 뒤따르는 열매인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지요. 교회에 속한 사람은 마땅히 육신의 부활을 그리스도와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The Apostle Paul, portrait by Rembrandt (c. 1657)

 

이것은 바울이 구약의 사례를 통해서 예시를 들며 설명한 것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곡물을 추수하기 전에 제사장들에게 첫 열매를 가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추수를 위한 첫 열매였습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다음 열매들이 있다는 말이며, 그다음 열매로서 추수한 곡식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부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부활을 추수에 비유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추수한 곡식은 이전에 뿌려진 씨앗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음의 추수를 위해서는 자신도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땅에 썩어져야 합니다. 육신은 하나의 씨앗으로 썩어지고 다시 열매로 태어나게 되고, 그리고 다시 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개체의 생명이 아니라 한 개체의 종이 번식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적용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교회라는 생명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그 몸을 구성하는 우리 각자의 부활, 즉 하나의 씨앗이 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확인되구요. 그리고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부활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로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한 생명 공동체로서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다른 몸을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 몸은 썩고 영광을 얻지 못하고 약하지만,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몸처럼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쇠약해지고 흙으로 돌아갈 우리 육신이 이 땅에서 완전히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즉 십자가와 부활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삶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과 관련되 세 가지의 말씀

지금까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전한 부활의 가르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의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예수님 자신이 육신으로 부활한 것에 대해, 이 일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 그대로 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어떤 구약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우쳤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아마도 구약에 나온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라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에 기록된 말씀 중 다음과 같은 세 구절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 오경인 신명기 18장 15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 자신의 뜻을 이룰 선지자 한 명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Moses Breaking the Tablets of the Law by Rembrandt, 1659

 

두 번째, 선지자의 글로는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는 반드시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 때문에 반대로 주변 사람들을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6편 10절 말씀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원문을 정확하게 직역하면 썩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고난을 받는 것은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이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위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한 명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처럼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로 보자면 출애굽입니다. 모세의 희생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지요. 그렇게 살아난 민족이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그 안에서 선지자가 계속 세워지면서 살고 죽고를 계속해서 반복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민족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일종의 생명 공동체라 할 수 있는데요.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생명 공동체가 부활의 몸으로서 모두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바로 이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겨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이 죽고 살고를 반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육신으로 부활을 우리 모두가 전체로서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생선 한 토막을 제자들과 함께 드셨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도 함께 생선을 구워 먹었을 것입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과 만나는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주심과 동시에 그 마지막은 항상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을 풀어 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그 후에 밥을 먹으면서 눈이 열리게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생선 한 토막을 드시는 것을 보고서야 확실히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뭔가를 먹어야지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몸의 생명이 유지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먹음을 통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먹는 것에 비유하지요. 성경을 단순히 읽는다 하지 않고, 말씀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며, 그 몸인 말씀을 우리가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서 영적인 생명을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먹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과 식탁 교제를 하는 가운데 눈이 열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밥을 먹으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오는 동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회상합니다. 성경을 먹으니깐 마음에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생선으로 식사교제를 하신 이후에 부탁을 하시는데, 너희들은 증인인데, 그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약속한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말씀하십니다.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들이 경험할 성령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식사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식사 교제를 통해서 더 나아가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st-peters-fish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로 믿으며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세워졌으며,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이 살고 죽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를 눈에 보이는 교회로 생각하지 마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보편적인 교회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읽으며 성령으로 영의 눈이 열리게 되어 진리를 깨닫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하나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오직 성경과 성령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할 때, 그로 인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서로 함께 공유하며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생명 공동체인 교회가 계속 그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조직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교회를 경험하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성경을 읽으며, 그리고 기도를 할 때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먹으며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면,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 공동체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어딘가에서 말씀을 먹고 성령을 받아 진리를 깨닫는 것이 나 혼자 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생명 활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 즉 내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죽게 된다면, 이것으로 인해서 생명 공동체의 부활 사건이 되어 많은 이들이 먹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Michelangelo,  Last Judgment, Sistine Chapel, altar wall, fresco, 1534–41

 

요즘은 제가 본문 말씀을 토대로 기도를 드리는데요. 지난주 복음 관상 기도라 말씀드렸지요. 오늘 본문으로 복음 관상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중 저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하나가 되어서 그 장소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생선을 나누어 먹을 때, 예수님이 생선 토막을 드시면서 반은 저에게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받아먹는데, 그 생선이 생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외로움이 떠오르더라고요. 오히려 혼자였음을 직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외롭고 고단한 일이구나. 주님 제가 외롭습니다. 앞 날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처럼, 저 역시 두렵고 의심이 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은 아무 말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기도가 끝이 났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반추를 하는데,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받아먹은 생선이 죽은 예수님의 몸이라 생각하니, 저 역시 죽음의 두려움과 함께 더 깊은 외로움이 몰려온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워진 선지자들의 심령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선지자로 세워졌다면, 다른 이들을 위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게 되잖아요. 자신이 죽어야지 다른 이들이 살아가기에 희생양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죽는 과정이 혼자였을 거 아닙니까? 죽음의 두려움도 컸겠지만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피할 수 없지요. 죽어야지만, 모두와 연결될 수 있기에, 죽어야지 외로움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외로울 때는 죽어야 할 때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제사장의 계보인 레위가 생각났습니다. 레위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의 아들 중 시므온과 함께 가장 폭력성이 짙고 잔인하지요 레위와 시므온은 조급하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여동생 디나를 강간한 세겜 족장의 아들 하몰과 그 일족을 거짓말로 속여 학살하잖아요. 결국 야곱의 가족은 이 일로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후 야곱이 죽으면서 유언할 때, 그 일로 인해 레위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주어집니다 야곱은 레위에게 너는 폭력의 도구이며, 저주받을 운명이며, 이스라엘에서 흩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아들들에게 레위와 시므온이 있는 곳에 함께 하지도 말고, 그들이 어떤 모의를 해도 절대 함께 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레위의 후손은 훗날 레위 지파로서 12지파 땅에 흩어져서 살아갑니다. 물론 모세가 레위 지파이기도 했지만, 야곱의 유언대로 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으로 성막과 제사를 책임지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의 본질적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을 사명으로 받은 것입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외롭게 홀로 살았지만, 자신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연합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레위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언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것입니다. 생명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는 일을 레위가 감당한 것입니다.

 

Holland, circa 1590 Series: The Twelve Sons of Jacob, pl. 2 Edition: First edition Prints; engravings Engraving Mary Stansbury Ruiz Bequest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을 경험하고 믿는다는 것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의 증인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하지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노라면 무거운 부담감에 짓눌려 이내 곧 무기력해지고 마는 자신을 끊임없이 마주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렵고, 더 나아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더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너는 혼자가 아니다. 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그리고 그 몸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 내가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여 죽을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함으로 인해서 나누어지는 내 몸이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 공동체 모두가 살아갈 양식으로 많은 열매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의식이란 바로 이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너희 마음의 눈이 뜨기를 원한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소명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함과 그들이 받은 능력의 지극히 큼을 알기를 원한다 말하며 이 기도를 드립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부활 증인으로 살아가는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 그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도 그 몸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기도를 저도 여러분을 위해 드립니다. 고난 가운데 성경을 읽으시고, 외롤 울 때 기도하십시오. 마음이 뜨거워질 것이고 영의 눈이 열리게 되어 육신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생명의 열매를 사모하고 기대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나의 육신 역시 썩어 죽어 버릴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부활의 몸처럼 새롭게 될 것을 소망하고 믿기를 바랍니다.

 

Saint Paul in Prison, by Gustave Dor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