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장 1절-13절 대속과 역설로서의 소명
이사야 6장 1절-13절
이사야 6장은 선지자로 부름 받게 된 소명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지난주는 예레미야의 소명장이었고, 이번에는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예례미야의 소명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시대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시대 배경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국제적 정세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반대로 당시 남유다의 국내 정세입니다. 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웃시야는 원래 본명이 아사랴로 유다의 열 번째 왕입니다.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습니다. 므낫세가 55년 통치를 했는데, 다음으로 긴 시간입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로 볼 때 매우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제국은 앗수르로 자국 내의 반란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서 이웃 나라를 침공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견줄 수 있는 나라가 아람 시리아인데, 당시 북이스라엘이 최전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기에 남유다를 직접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웃시야 왕의 아버지가 아마샤 왕입니다. 아마샤 역시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며 다윗이 정복하였다가 이후 다시 독립하여 남유다를 괴롭힌 에돔을 정벌하였습니다. 따라서 웃시야 왕은 본인의 큰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남유다가 솔로몬 이후로 최고 번영기를 누린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안하면 사람이 교만해지는지 몰라도 말년에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감당할 수 있는 성전 분향을 직접 하려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병에 걸리고, 결국 별궁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로 인해 아들 요담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웃시야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교만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성경을 읽어보면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웃시야의 이름이 아사랴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대제사장의 이름 역시 아사랴입니다. 역대상 27장을 보면 웃시야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하자, 대제사장 아사랴는 젊고 용감한 제사장 80명을 동원하여 왕을 말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젊고 용감하다는 뜻인 히브리어 하일은 유력한이라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아마도 아사랴가 남유다의 유력한 제사장 세력을 동원해서 웃시야에 대항하여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과 대제사장의 이름이 같다는 것은 당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켰던 유다 사회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방 나라들의 경우는 왕들도 제사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데, 이런 관습에 영향을 받아서 웃시야 역시 왕권과 제사장권을 한꺼번에 가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웃시야의 아내이자 이후 요담 왕의 어머니이기도 한 당시 왕비인 여루사라 불리는 여인의 출신을 봐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루사는 사독 제사장의 후손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독은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를 때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으로, 솔로몬 이후로부터 남유다가 망하고 난 후 바벨론 포로기와 그 귀환 시기를 거쳐, 중간기라 불리는 마카비 왕조에 이르기까지 남유다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세습 제사장 가문입니다. 웃시야가 가장 유력한 대제사장 가문과 혼사를 맺은 것입니다. 혼사로 정교일치의 강력한 왕권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웃시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웃시야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나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이후로 별궁으로 물러가 격리되어 죽기 전까지 10년간 요담 뒤에서 섭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섭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웃시야는 실각하여 물러난 것이고 웃시야의 아내이자 요담의 어머니인 여루사가 섭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웃시야를 나병이라는 핑계로 별궁에 가두어 놓고 사독 가문과 당시 대제사장인 아사랴가 왕을 대신하여 통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왕이 대제사장이기도 하고, 대제사장이 왕이기도 해서, 웃시야의 또 다른 이름인 아사랴와 대제사장의 이름인 아사랴를 동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비 여루사와 대제사장 아사랴의 섭정이 요담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담 이후의 왕인 아하스에게까지 이어져서 3대에 걸친 오랜 섭정 통치 기간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요담이 25세에 왕에 올라 총 16년을 다스리는데, 10년을 섭정했다면 자신이 직접 통치한 시기가 6년에 불가합니다. 아하스의 경우에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총 16년을 다스립니다. 요담은 비교적 유다를 잘 통치한 선왕이었지만, 아하스의 경우는 손꼽히는 악한 왕입니다.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식을 산채로 바치는 암몬의 신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분향하였습니다. 이후 시리아에게 패배하고 북이스라엘에게 침공당하고, 에돔에게도 공격당하고, 심지어 남유다를 도와달라고 불렀던 앗수르에게도 정복당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아하스 역시 할머니인 여루사에게 섭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경우는 남유다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이방 나라의 침공으로 본인이 외교 사절로 남유다를 떠나 있었던 시기가 많았습니다. 말이 외교사절이지 일종의 볼모로 끌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하스의 통치 기간이 16년 동안 이어졌는데, 그 기간 중 무려 12년간은 그 아들 히스기야와 공동통치를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역시 섭정의 기간이라 보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신기한 것이 아하스가 만 11세에 히스기야를 낳았고, 당시 아하스의 아내이자 히스기야의 어머니 역시 16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임신 가능한 나이이긴 한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를 놀라운 일로 생각해 처녀가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구절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적용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다소 길게 당시 남유다의 국내 정세를 말씀드린 것은 웃시야가 죽은 해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를 걸쳐 므낫세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을 활동한 선지자가 바로 이사야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왕과 제사장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고, 웃시야 이후로는 제사장 측의 승리로 상당기간 동안 사독 제사장 집안의 섭정, 즉 제사장 정권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가 바로 이사야인 것입니다. 이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어느 날 성전에 있다가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직 선지자로 부름 받기 전이었는데, 왜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성전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왕족으로 앞서 성전분향하다 나병에 걸린 웃시야 왕과 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세력에게 견제 대상인 왕족 이사야가 성전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지성소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앞서 웃시야가 성전에서 분향하다가도 나병에 걸려 별궁으로 쫓겨나갔는데, 제사장도 아니고 왕도 아닌 이사야가 성전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 나왔다는 것은 마치 반역 행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대제사장이 알았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웃시야는 이 자리에 나왔는데, 본인도 이것이 위험한 일로 알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심지어 지성소에서는 대제사장도 죽을 수 있는데, 본인이 살아남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당장이라도 죽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게도 그 자리에 홀로 나아간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 6장에서 그리고 있는 성전은 단순한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재판정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법을 집행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왕의 권자이자 재판관의 자리를 연상시키는 지성소 법궤 위에 놓인 하나님의 보좌 역시 온 세상의 최고 재판장으로서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스랍들이 외치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 외치지요. 이것은 신명기 19장에서 법정에서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하라고 한 말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 번 입으로 외치는 증인의 역할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증언하는 증인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확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불어,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리는 장면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전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정의가 선언되는 법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사야가 왜 지성소에 나아갔는가 하면, 바로 웃시야 왕의 성전 분향 사건에 대한 판결을 대신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6장 1절에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는 마치 웃시야의 죄에 대한 대속적 판결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웃시야는 성전에서 부정하게 행동하여 나병에 걸려 고통받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주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웃시야 왕이 저지른 잘못을 본인이 똑같이 행함으로써, 웃시야 왕이 받아야 할 심판을 자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웃시야와 이사야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분향하려 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병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함을 인정하고 회개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방식이 무척 독특한데,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일단 스랍의 말을 들어보면, 이사야가 잘못한 것은 맞다는 것입니다. 웃시야도 마찬가지이지요. 왕이든 왕족이든 제사장이 아니면 성전에 들어와 제사장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웃시야와 달리 자신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부정함을 인정하면, 제단 숯불로 정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판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동시에 사면을 받은 장면과 유사합니다. 즉, 웃시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받습니다. 웃시야가 성전에서 쫓겨났다면, 이사야는 정결함을 받은 후 선지자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대속입니다. 이사야가 웃시야를 대신해서 재판정에 나왔듯이, 소명은 나의 유익이나 나의 잘못으로 이끌림 바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이나 타인의 잘못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인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대속이 목적입니다. 타인의 죄를 경감시키기 위해서 대신 죗값을 치러주는 것입니다. 나의 소명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속적 성격이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할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주님께서도 내가 누굴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갈 것인지 묻지 않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대신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가는 것이고,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람을 대신해서 가는 것이 소명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의 아들인 요담의 경우,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신은 평생 성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고 봅니다. 요담의 치적 중 성전 윗문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데 이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왕이자 아들조차도 피하고 싶은 것이 성전 안으로 대신 들어가는 것인데, 바로 이것을 이사야가 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부르심에는 일종의 땜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가기로 결정되어 있는데, 상황이 바뀌어서 내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을 수 있지만 가는 것이기도 하고, 예정에도 없었던 일이 생겨서 급하게 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로는 유다가 베냐민 대신 애굽에 남아 종이 되겠다고 요셉에게 제안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냐민의 곡식짐에서 요셉의 잔이 나오자, 다른 형제들은 나몰라 하며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상황에서 베냐민을 대신해서 본인이 남겠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소명은 역설적입니다. 이사야가 대속적인 행위로 좋은 의도로 지성소에 나아왔지만, 이것은 적법한 행위가 아닙니다. 분명히 잘못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사야의 입을 숯불로 정결케 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러니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잘못된 선택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한 결과로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가장 큰 패배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는 승리가 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겼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펠릭스 쿨파(Felix Culpa)라 해서 복된 죄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아담의 죄가 바로 대표적인 펠릭스 쿨파, 복된 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나 잘못이 오히려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개념입니다. 영어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하지요. 의도하지 않은 우연으로부터 얻은 좋은 결과나 발견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류 보건에 절대적 기여를 한 페니실린, 항생제의 발견이 대표적입니다. 과학 연구 분야에서 실험 도중 실패로 인해 얻은 결과에서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이게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은 참으로 역설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불러 시키는 일을 보십시오, 10절입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이사야에게 준 소명은 역설적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해서 마음을 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게 해서, 고침 받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죄에 완전히 오랫동안 빠지게 하여서 회복할 가능성을 다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묻지요. 언제까지 하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 분의 일이 남아도 다 타 죽어서, 이제는 다 전멸했구나 생각이 들 때, 그 땅에 거룩한 씨를 남겨서 그루터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와 신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만 남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대속과 역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종의 영적인 훈련입니다. 누가 대속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역설적인 상황을 반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그런 상황을 만들어 부르신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소망입니다. 불가능하고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결국 여기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믿는 자로서 소망하는 자로서 세우실 때, 반드시 대속과 역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결국 이것은 누구나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